(디모데후서 4:9-22,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두 부류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바울을 버린 사람들과 그와 함께 있는 자가 있다.
바울에게 해를 입히고 대적한 자가 있고 그의 일에 유익한 자가 있다.

아마도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이 두 부류의 구분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도 다툼과 대적과 원수 됨과 갈라 섬이 있을 수 있다.
아, 얼마든지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극단적인 적대가 아니어도 무관심과 소원해짐과 불편함과 결국 남남처럼 된 사람도 있다.
나는 하나님을 같이 믿는 자로서 한 형제가 되지 못했고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남보다도 못했을 것이다.

바울을 버리고 간 자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울과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뜻이 안 맞아 각자의 길로 간 경우도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마가와의 동역에 대한 이견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버린 것이 아니며 더욱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성도 간에도 얼마든지 불협화음이 있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면서도
각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가능성이 그만큼 넓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서로를 버리는 일은 큰 문제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모든 다툼과 갈라섬은 이로 인해 생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

바울을 버리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이
꼭 동일한 장소에서의 공존 여부에 달린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바울을 버린 자들은
“데살로니아로 갔고” “갈라디아로” “달마디아로” 갔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고 했다.
즉 누가는 바울과 여기에 함께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바울이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다.
이 외에도 각자 다른 곳에서 각각의 사역을 감당한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있다.
서로 다른 사역과 사정으로 각각의 장소에 있을 수 있고
다른 곳으로 파송되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가, 그것이다.
바울을 떠나는가, 그와 같은 장소에 있는가, 이게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바울 곁에 있어도 진실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이나 자기 자랑을 위해서 바울을 빙자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린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아,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또 얼마나 정반대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실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났다!
그러나 본문의 ‘세상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일도 아니며, 성도가 할 바도 아니다.
우리의 세상에 대한 자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사랑이다.
바울을 버린 자들이 한 세상 사랑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쾌락에 불과하다.
내가 참으로 정신 차려서 하나님이 하시듯이 세상을 사랑하며,
또한 바울을 버린 자들이 하듯이 이기적 쾌락으로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