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3:10-17, 잘 책망받고 기꺼이 교정하고)

어제와 오늘 말씀은 결국 같은 내용을 가지고 대조되는 두 경우를 말한다.
둘 다 배움에 대해 가르친다.
하나는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었다.
똑같이 배움으로 시작했으며, 심지어 동일하게 계속 배우고 있는데 결과가 전혀 다르다.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는 심지어 “항상” 배우고 있다.
그러나 배우는 데도 진리를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가 분명히 언급되었는데 바로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었기 때문이다.
욕심은 모든 배움을 무효하게 만든다.
“항상” 배울지라도 욕심 때문에 탐욕에 집착하여 진리로 마음이 향하지 않는다.
욕심이 마음을 완전히 봉쇄한다.
그리하여 어떤 진리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결국 그 배움은 사람들 눈에 고상하게 보이기 위한 외식에 불과하다.

오늘 말씀은 그 정반대의 경우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에서 어제 말씀과 차이는 욕심에 끌리는 여부다.
욕심에 끌린다는 것은 “확신한 일에 거하”지 않는 것이다.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의 유익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어떤 유익이 있는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즉 성경은 가르치는 데 유익하며,
잘못을 꾸짖는 데 유익하며, 잘못한 데서 교정되는 일에 유익하며,
올바르게 교육하는 데 유익하다.
여기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책망과 바르게 함”이다.

항상 배우지만 욕심에 끌리는 자는 책망을 회피한다.
욕심은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고 책망은 자기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 둘은 공존할 수 없다.
그리고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결국 그 잘못을 고칠 수 없다.
욕심은 결국 “책망과 바르게 함”에서의 유익을 무효화시킨다.
즉 욕심에 끌리는 것은 책망 듣기 싫어하는 것이요 고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책망과 교정을 싫어하는 것은 곧 자기 욕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배우느냐,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정말 욕심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나는 자기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책망을 감사하고 겸손하게 들어야 한다.
조금만 귀가 거슬려도 마음에 반발하는 것은 책망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얼마나 낮아지고 부드러우며 넓어야 하는가!
이것이 참으로 나의 기도제목이다.
그리고 나를 고치는 일에 나는 참 게으르다.
이것이 문제다.
단순하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순종을 유보하고 다른 핑계를 대고 시간을 낭비하는 습성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이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나의 변화를 사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