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3:1-9, 항상 배우나)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라고 경고한다.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부유해지고 발전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진리를 알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고통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과 경제적 진보 여부가 고통의 여부로 귀결되지 않는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바울은 “경건의 모양”과 “항상 배우”는 자들을 말함으로써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경건이나 진리 같은 것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것을 위해 애를 쓰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수고와 실천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일 수 있다.

“항상 배우”는 것이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마든지 가식적으로, 위선적으로 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경건을 강조하고, 경건하게 보이려 하고,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랑을 위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욕심에 끌린 바”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경건하게 보이고 항상 교육열에 불타고 있다고 ‘보이는 데’에 있다.
아, 나를 잘 보이려는 이 치졸한 외식.
이것은 진리와 생명과 무관하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욕심에 끌린 바” 때문이다.
하나님은 겉모습에 결코 속지 않으신다.
사실은 사람들도 속이기가 쉽지 않다.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모양만 있는 것은
사람들도 속으로는 혐오하고 위선자라고 판단한다.
들통이 나기 마련이다.
그걸 모르는 자는 자기 자신뿐이다.
욕심과 진리, 욕심과 경건은 전혀 상관이 없는 쌍이다.
문제는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자라서 사망으로 귀결된다.(야고보서 1:15)
그러니 아무리 배워도 욕심으로 시작된 것이니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죄만 풍성해지고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욕심의 핵심은 자기중심이요 자기 자랑이다.
배우는 일, 지식을 쌓는 일은 얼마나 근사하게 보이는가!
똑똑하게 보이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것은 사람을 꽤 잘 속일 수 있다.
“항상 배우”는 자는 우선 노력하는 자로 인정을 받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높여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겉모습에 속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항상 배우”는 모습이 아니라 그 속의 “욕심”을 보신다.
그것을 아주 잘 아신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지식의 겉모습이 아니라
욕심 없는 정결함으로써여야 한다.
자기 자랑과 자기중심의 욕심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그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은 자명하다.
아, 내가 나도 속일 수 없는데 어찌 사람을 속이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는가!
나의 위선과 외식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항상 배우되 참으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서여야 한다.
자기 자랑의 욕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낮아지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