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2:13-30, 성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오늘날은 성이라는 영역을
극단적으로 개인의 취향 문제로 돌려서 둘이 뜻만 맞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성의 해방이라고까지 부른다.
이것이 해방이라면 그 이외의 것─전통적인 성도덕─은 모두 구속이요 억압인 셈이 된다.

정반대로 성은 여전히 사람들을 비방하는 가장 쉬운 노리개가 된다.
거의 모든 추문(스캔들)은 성과 관련된다.
성을 개방하고 해방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성 문제는 마음 놓고 비방거리로 삼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더욱 큰 문제는 사실 여부가 밝혀지기 전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전략으로
이미 상처를 입히는 오늘날의 무책임한 여론 문화다.

이에 비해 성경은 성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의 질서 문제로 보며,
그리하여 분명한 성적 규범과 엄격한 처벌이 강조되었다.
또한 성경은 성적 추문의 문제가 근거 없는 비방 거리로 전락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이가 없도록 공적으로 다루어 사실성에 따라 판단하도록 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고자 할 경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내에게 죄와 관련된 문제가 있을 경우다.
가정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성적 결합의 질서가 깨어질 때
그것은 범죄이며 이혼의 사유가 된다.
그리고 죄를 범한 자는 사형의 벌을 받는다.
아, 하나님께서 가정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며,
그것을 깨뜨리는 죄를 그렇게 엄하게 다스리신다.
다른 하나는 남편의 마음이 변하여 아내를 미워하게 된 경우다.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만다.
그때 남편은 자신의 변심이 합당하게 여겨질 구실을 만드는데,
본문의 예처럼 아내를 “비방거리”로 만들어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바로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아내가 처녀성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두 경우 모두 사적으로 처리된다.
성은 이제 개인의 사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욕하고 비방하고 추문으로 만들어 퍼뜨리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문화가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반드시 공적으로 다룬다.
전자와 같이 범죄의 경우라도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그것은 공적인 판결의 과정을 거쳐 공적 권위에 의해 결정되고 시행된다.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성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해결되어야 한다.
“성문”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공공의 장소이며 바로 공적인 재판의 장소다.
즉 이 문제는 공적으로 조사되고 논의되고 판정된다.
이 과정에서 증거가 매우 중요한데 그에 의해 사실 여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보다 훨씬 제도적인 장치가 미비되었던 3500년 전의 이스라엘 사회는
이렇게 한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단지 추문과 비방거리가 되거나
근거 없는 권위주의적 가부장제에 의해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구체적인 배려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공적인 제도가 훨씬 발전했음에도
사적인 비방과 상처가 난무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무분별한 ‘인민재판’은 사실성에 관계없이 그저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만 하면
그의 사회적 삶이 결딴나게 만드는 전횡적인 파괴력을 행사한다.
무수한 남 말, 신나는 익명의 댓글들.
‘성문’도 있고 ‘장로들’도 있는데 사람들은 그저 사적으로 ‘가지고 놀기’를 선호한다.
참으로 비인격적이다.
참으로 무책임하며 참으로 무질서하다.

꼭 이런 주제가 아니어도 교회에서도 입방아 찢기는 얼마든지 흔하다.
뒤에서 남 말하기가 얼마나 신나는가!
성도가 할 말은 말씀과 삶의 나눔으로서 교제이며,
죄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성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공적으로,
그리고 사실성에 입각해서 다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