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2:1-12, 가능한 것과 합당한 것, 현실과 규범)

세상에서는 점점 더 가능한 모든 것을 자연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한다.
가능한 것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능력이 없어 할 수 없는 것의 반대를 의미한다.
즉 인간은 맨몸으로 날 수 없지만 ─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걷는 것, 뛰는 것은 가능하다.
또는 특수장비를 이용하여 비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해도 된다는, 심지어는 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죽은 것을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든 생명체든 죽일 수는 있다.
사람은 도둑질할 수 있고, 거짓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해도 되거나,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곧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그 균형은 깨졌다.
그 후로 인간은 옳지 않은 수많은 일을 저지른다.
성경이 죄로 정하는 모든 것을 인간은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선한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능력을 보여준다.

본문에서 가능한 것과 합당한 것이 구분된다.
이웃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못 본 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가능성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는 거의 의도적이다.
사람은 이웃의 곤경을 의도적으로 못 본 체한다.
이기적인 본성(죄성)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규범이다.
하나님은 “못 본 체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못 본 체하지 말라는 것은 시선의 문제만이 아니다.
눈을 부릅뜨고 보기만 한다면 그것은 못 본 체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못 본 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도와 그가 곤경을 헤쳐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남녀가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마음먹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성의 정체성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먹는 것으로 말하면 이로 씹을 수 있고 목구멍으로 삼킬 수 있으면 인간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새의 보금자리에서 ···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라고 하신다.
생태계까지도 인간이 할 수만 있으면 정당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그래야 정당하다.

건축 공사에서 안전을 무시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성이다.
건축 업자가 돈을 받은 대로, 받은 만큼, 사실은 계약한 대로 일하지 않고
재료를 더 빈약하게 쓰고 설치할 것을 설치하지 않으면
아마도 이윤은 더 많아질 것이나 그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건축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그 집의 이용자가 거기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건축자의 사명이다.

다른 종류의 교배도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창조세계의 보존을 위해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종 교배를 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며 정당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지의 여부에 의해 정당성이 결정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그것은 정당하다.
그것이 곧 인간의 규범이다.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은 동물세계에서 약육강식이 법칙이므로
자연으로서 인간도 그것을 행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인간에게도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것이 자연적인 일이요, 그러므로 정당하다는 논리다.
그 전제에 문제가 있다.
인간과 자연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창조와 그 이후의 타락을 알지 못하므로
지금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처음부터 가능했던 자연의 속성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와 다르다.
인간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하신 규범이 있다.
자연 현상과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독특한 가치와 목적과 삶의 방식이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자연 현상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을 자연화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소치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자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