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1:1-23, 공동의 책임)

죄악의 땅 가나안은 멸절되고 이제 이스라엘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의 땅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의이기도 하고,
사실은 대체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공의를 사람들이 순종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아간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열등한 적에게 패배한 뒤에
하나님은 그 일이 누구 때문인지를 정확히 밝혀주셨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사례이고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밝히지 못할 경우 미해결로 남는다.
하나님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다 밝히시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수사력 부족과, 그보다 더 범죄자의 기만을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제 사건으로 된 그것이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되지 않고
공동으로 책임을 질 절차를 만들어주신다.
하나님이 범인을 모르셔서 그러시겠는가?
아니다.
범죄의 책임자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는 잠시 동안은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겠으나,
아무리 길어야 그가 죽은 뒤에라도 ─하나님을 속인 죄까지 포함하여 더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결 사건을 곧 하나님의 전능하지 못하심의 증거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공동 책임의 절차는 사실 매우 가벼워 보인다.
살인죄는 사형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범인이 색출되지 않았을 경우
피살된 시체의 발견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이 암송아지 제사를 드림으로
그 범죄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감당한다.
범죄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살인죄의 책임이 그냥 간과되는 일은 없다.
그것은 공동체의 책임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을 사형해야 하는 비인격적 연대책임은 부과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미해결로 남은 사건일지라도
반드시 공동의 책임을 통해 공의가 만족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유족이 아니고는 아마 나머지 모든 사람은 이 일이 그냥 소리 없이 지나가기를 바랄 것이다.
그게 인간의 무책임 본성이다.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이기적 태만이다.
이러한 성향이 내게 얼마나 많은가!
내가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과연 공의인가?
아마 말로는, 원칙으로는 그렇게 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과정에서 내게 불편하고 신경 쓸 일이 생길 경우에
나는 공의를 희생하고 편함을 추구하지 않는가?
나는 피해자 가족의 슬픔과 분노를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그 일로 진노하시고 불쌍히 여기실 공의로우신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바로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떠오른다.
나는 나의 일을 핑계로 공동체적 (돌봄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가?
나는 가던 길을,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공동의 책임을 기꺼이 지는가?
그러고 있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에서 가까운 성읍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드리는 제사는
이 성읍의 주민들을 이 죄에서 속량하여주시기를 바라는 제사다.
만일 이러한 공동의 책임 절차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들에게서 이 죄의 책임을 물어도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공동 책임을 간과하면
사실은 그 죄의 형벌을 내가 지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간접적인, 매우 쉬운 공동의 책임 절차마저 지기 싫어한다면,
결국에는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죄를 숨김으로써
공동체가 애매하게 그 죄의 책임을 지게 된다는 사실에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