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9:1-21, 도피성의 공의)

하나님께서 가나안 여러 민족들을 “멸절”하신 후
이제 이 땅은 이스라엘에 의해 거룩한 땅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주기 위해 가나안의 일곱 부족을 없애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었고 공의를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이 민족들의 사무치는 죄악을 공의롭게 벌주고,
이스라엘을 통해 공의로운 땅으로 바꾸실 것이다.

그럼 가나안 민족들의 멸절 후 과연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공의롭다는 것은 우선 잘잘못이 정확히 가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잘잘못의 기준이 명확해야 함을 전제한다.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이웃을 죽인 일”은
악의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살인한 경우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자는 무조건 무죄라고 하는 것은
피해자의 유족에게는 부당한 일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은 “부지중”의 실수가 사형의 엄벌에 처해지는 것도 막으시고,
피해자 가족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 심정도 헤아리신다.
공의는 그 사이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도피성”으로서 그 공의를 이루신다.
도피성은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이웃을 죽인” 자를 일단 보복으로부터 보호해주어 생명을 잃지 않게 하지만,
그는 사실 도피성에서 오랫동안 가족과 고향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겪는다.
그것이 그가 억울한 유족들에게 갚아야 할 죄의 값이다.
그는 아무것도 치르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면책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한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함으로
피살자는 물론 그의 가족에 엄청난 불행을 야기했다.
이 책임을 “복수심에 불타”는 보복살해로부터 보호하면서 감당하게 하는 것이 도피성이다.

도피성은 흔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것으로 비유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공짜로, 아주 값싸게,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그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그것은 값싼 구원이 아니라, 아주 비싸게 값을 치른 구원이다.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막으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셨다.
예수의 피야 말로 “무죄한 피”다.
우리에게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못하게 하시면서,
하나님 스스로는 자기 아들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셨다.
우리의 도피성은 굉장한 값을 치른 보호소다.

공의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중요시하시는가!
하나님은 얼마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공의롭게 대하시는가!
반면에 나는 공의를 얼마나 쉽게 헐값에 팔아버리는가!
나는 공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결국은 내 편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정에 따라, 오로지 내게 유리하도록,
때로는 가해자의 편이 되고, 때로는 피해자를 두둔한다.
내게 유리하면 무죄한 자도 적으로 간주하고,
그 반대로 죄 있는 자라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공의를 내팽개치기도 한다.
아, 그것은 공의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나의 편을 확보하기 위한 불의한 술수에 불과하다.
공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 편만을 두둔하는 태도로는 공의를 결코 이룰 수 없다.
나를 위해 스스로 희생되는 우리 주 예수의 구원이야 말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공의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세상 모든 사람의 각 사정을 헤아리시는 공의다.
예수님은 자기 편리함만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나도 그래야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