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7:1-26, 저주에 대한 아멘)

율법은 단순히 명령만이 아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흔히 상명하복,
위에서 명령하면 아래에서 복종하는 군대식 위계체제의 질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명령과 법조문이 아니라 ‘언약’으로 주신다.
언약이란 둘 사이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계약이다.

물론 율법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이 머리를 맞대고
오랫동안 회의하고 타협안을 작성하고 투표하여 결정된 공동 문서는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사람의 고안, 또는 하나님과의 공동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약속을 하려 하신다.
마치 국민 모두가 제헌의회의 의원이 아니지만
거기서 제정된 헌법이 국민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은 나중에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실 때도
하나님이 정하시지만 백성들의 제비뽑기(일종의 동의)를 통해 그것이 드러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백성들이 하나님과 약속을 맺는 방법을 통해 지키도록 하신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직전, 요단강을 건너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지파별로 반으로 나누어 그리심 산에 서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 서서 저주를 선포한다.
그때 축복과 저주는 일방적인 포고로 끝나지 않는다.
백성들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을 때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네,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넘어서
그 내용이 전적으로 옳으며 그 말씀에 따르겠다는 자발적인 동의의 표시다.

본문은 축복과 저주 가운데 후자에 관한 부분이다.
레위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외치면
“모든 백성”은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그것은 우상을 만드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는 율법이 옳다는 동의이며,
만일 우상을 만드는 자가 있다면 저주를 받겠다는,
즉 율법의 조처를 따르겠다는 결의다.
그것은 곧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언약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한자리에 앉아 공동의 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문서의 내용이 유효해지고 그에 따라 시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가 합의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의 역사적인 장면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성도가 하는 동의와 결의이기도 하다.
나는 날마다 매일성경의 본문을 듣고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그 말씀에 동의하고 그대로 살기로 결의하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치를 대가가 있음을 고백한다.
아, 얼마나 많은 날을, 많은 순간을 나는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저주’의 대가를 치러야 했는가!
물론 내가 십자가에 달리는 처형을 받거나 태형이나 구금으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는 다음 날, 다음 순간 내 죄를 깨닫고 곤고하여 하나님 앞에 통한의 회개를 한다.
이 약소한 대가로는 언약 내용의 저주를 감당했다고 하기에 너무 부족하지만,
사실은 우리 주님이 내 대신 당하신 대속의 은혜로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다.
아, 내가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겠다고 언약에 서명했는데
그것을 어기고 내 대신 예수께서 그 저주를 받으심으로 내가 살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무 대가도 없이 하늘에서 ‘너희는 이제 죄가 없다’라고 만인 구원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땅에 보내셔서 고난 당하고 죽게 하심으로써
불순종의 대가인 저주를 받게 하셨다.
그리하여 내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나는 다시금 이 말씀 앞에서 “아멘” 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순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