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5:1-19, 범죄한 형제라도 경히 여기지 말 것)

하나님의 공의는 매우 엄정하면서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사랑이 넘친다.
이 두 가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화되기 어렵다.
엄정하면 사랑을 잃기 쉽고,
사랑이 넘치면 엄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엄정함은 죄인을 엄격하게 다스려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함으로써 공의가 이루어졌다고 하고,
사랑은 죄를 덮어주고 대충 넘겨 그가 기죽지 않게 하려 한다.
그러는 가운데 공의는 한쪽으로 치우쳐 삐걱거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어떠한가?
도피성에서 이미 보았듯이
하나님은 부지중에 벌어진 살인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유족)를 다 배려하신다.
일방적이거나 편파적이지 않으시다.
원한 없이 실수로 살인하였다 해도 그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으며,
피해자의 유족은 가해자를 사형에 처함으로써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복수심을 조절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의 경중에 따라 마땅한 형벌의 차이를 둔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있다면 태형을 당할 죄도 있으며,
벌금으로 해결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그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
하나님은 범죄자라도 그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는 죄로 인해 벌어진 비극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이 처벌과 함께 다시 온전히 회복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벌을 통하여 범죄자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며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누구도 “경히 여기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공의는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죄인을 짓밟아 존엄성을 말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형의 최고 한도인 40대를 맞는 것 자체가 죄인이 이미 당하는 수치다.
공정한 재판을 통해 죄가 입증된 것 자체가 죄인이 치러야 할 대가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
마음대로 때리고 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정이 있는 것이다.
그 죄에 해당하는 처벌만이 공의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공의를 무시하는 처사다.
하나님이 막으신 것을 행하는 것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죄인은 물론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의를 경히 여기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는가?
내 마음에 들면 무조건 두둔하고,
수가 틀리면 가혹하고 잔인하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는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가?
죄인에 대한 긍휼이 있는가?
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데 아주 재주가 있지 않은가?
부끄럽다.
창피하다.
나는 내가 경히 여겨지고 수치스럽게 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하는 데는 가책이 없으니 참 모순이다.

여전히 내가 돌아가야 할 말씀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그 “긍휼하심”(디도서 3:4,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