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1-18, 암몬과 모압과 애굽)

가나안에 들어가 구성될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는
주변 세계와 구분되는 거룩함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단위인 총회는
거룩함을 기준으로 배제되고 포함된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며
“애굽 사람···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암몬과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의 총회에서 배제되고,
애굽 사람들은 일정 기간의 거룩함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 수용된다.

양자가 다 문제가 있었다.
암몬과 모압은 광야 생활 40년이 지난 후 요단 동편으로 북상할 때
이스라엘의 신사적이고 친절한 제의를 무시하고 그들을 ‘훼방’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먼 친척임이 고려되어 가나안 부족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철저히 그들의 동의에 따라 그들의 땅을 지나려 했다.
설령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어도 이스라엘은 그에 대한 일체의 보복을 가하지 않았다.

애굽의 문제는 너무도 분명하다.
400여년 이상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가둬두고 노동을 착취한 그들이다.
맨처음에 요셉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들어갔을 때 요셉을 통해 많은 덕을 보았으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잊힌다는 핑계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암몬과 모압은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애굽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으셨다.
무슨 차이일까?
혈통으로 따지면 암몬과 모압은 이스라엘의 먼 친족이고
애굽은 이스라엘과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혈통으로 이들을 구분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들이 행한 일, 즉 훼방과 노예화는 어떠한가?
노예화가 더 근본적인 죄악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훼방을 더 악한 것으로 단정하신다.
노예화는 분명 잘못이지만,
400년이 넘는 동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객”으로 살았던 것을 하나님은 중시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갖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몬과 모압은 이스라엘을 거절했다.
그들은 신사적인 요청을 거부했다.
먼 친족임에도 아무런 선대를 베풀지 않았다.
나아가서 그들은 종교적인 술책을 동원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전적으로 이방인인 애굽보다 이들이 더 악으로 대한 셈이다.

물론 애굽 사람들이 무조건 이스라엘의 총회에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삼 대 후”에야 가능하다.
이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살면서 애굽의 것을 다 청산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암몬과 모압의 경우는 아예 이러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들에 대해 얼마나 진노하시는지가 분명하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가 이웃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의 교훈에 적용된다.
성도는 그 누구도 노예화하거나 훼방이나 저주를 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였을 경우라면 바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근신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훼방과 저주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새삼 배워야 한다.
남을 돕지 않는 것, 남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것,
심지어는 잘못되도록 실제적인 조처를 취하는 것,
이런 것을 하나님이 참으로 싫어하신다.

그리고 역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객”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데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성도는 누구라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나를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성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