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12-29, 공평한 수고, 공평한 복)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부름받은 곳은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은 지중해로부터 요단강까지의 영역, 즉 요단 서편의 땅이다.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가데사 바네아를 통해 바로 북쪽으로 뻗어있었다.
만일 정탐꾼들의 문제만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38년 전에 이미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범죄 때문이었고, 그 대가를 40년 동안 치러야 했다.
그 벌이 끝나자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에게 다시 가나안에 들어갈 길을 인도하신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단 저편(동편)을 통해서다.
그것은 더 먼 길을 통한 우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보다 더 큰 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미 요단 동편의 많은 땅을 덤으로 받았다.

하나님은 에돔, 모압, 암몬은 먼 인척이므로 우회를 하고
아모리와 바산은 점령하게 하셨다.
이를 통해 이미 요단 동편에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생겼다.
그것은 그냥 가나안에서의 전쟁을 위한 훈련상황이 아니었다.
그 땅은 두 지판 반에게 분배된 이스라엘의 영토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약속 이상으로 요단 동편의 넓은 땅도 얻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잘 준비된 무력으로 승전한 것이 아니었다.
승리의 요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순종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
이제 가나안의 정복이 시작될 것인데,
먼저 땅을 확보한 지파가 있고 그들은 이미 다른 지파에게는 불공평의 시비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는 교전 중인데 누구는 안식을 누리고 있다?
해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모든 지파가 안식에 이를 때까지
요단 동편에서 먼저 땅을 얻은 지파들이 선봉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지파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이것은 일체의 불만을 불가능하게 했다.
모든 지파가 함께 희생하며 함께 이스라엘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와 경우는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모세는 실제로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관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아니,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하셨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이 말씀은 1500년 후 바울도 들었던 말씀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9)

모세에게 허락된 것은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모세가 “볼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자는
그 이후에 여호수아가 인도할 백성들이다.
그러면 모세는 불공평해지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가나안을 “볼” 것이요,
그것은 이후의 백성들이 들어갈 땅이 될 것이다.
땅을 보는 자와 그 안에 들어가는 자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우열로 차별되는 것은 아니다.
모세가 “볼” 땅은 백성들에게 들어갈, 즉 “기업으로 얻게” 될 목표가 되고,
결국 성취가 될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분명한,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해 준 것이다.
이로써 모세는 죽는 순간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족한(충분한) 은혜인가!

내가 공평하게 다른 형제들을 위해 수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내가 이미 보고 있는 복이 이후에 그것을 누릴 다음 세대에게 분명한 목표가 되므로
나는 얼마나 공평한 복을 이미 받은 것인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