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19-33, 우리가 어디로 가랴?)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호렙산을 떠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두셨”던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로 갈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갈 길을 명령하셨고, 그들이 있을 곳을 주셨고,
그 땅을 그들 앞에 두셨다.

이렇게 해서 이른 가데스 바네아는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의 관문이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것 같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의 정탐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는지를 미리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땅이 좋”은 것을 알고도
그들은 두려움에 빠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좋은 땅’이 왜 갑자기 ‘두려운 땅’으로 되었을까?
그것은 그 땅이 너무 좋아서였다.
거기서 나는 과실이 너무 크고 땅이 기름진 것이 문제였다.
갑자기 그 땅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등감을 느꼈다.
그렇게 좋은 땅에 우리가 들어가다가 되려 당할 것이라는 걱정이다.
아, 만일 황무한 땅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면
그들은 아무 적이 없는 것을 안심하여 만족했겠는가?
아니다.
어떤 상황도 핑계가 될 수 있다.

지난주 시편 106편에서 묵상한 말씀이 바로 이와 같다.
그 본문도 출애굽 여정에서 이스라엘이 범한 전형적인 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인도해오신 여정을 싹 잊어버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랴” 하고 탄식한다.
과연 그것에 대해 한탄할 일이 있는가?
하나님의 인도를 그렇게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 얼마나 좋은지 보고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자처럼 “우리가 어디로 가랴” 하고 탄식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그 기이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모세가 이에 맞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백성에게 되뇐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보다 먼저 가셨고 이스라엘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것과 똑같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도 친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로 가랴”라는 회의는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품에 안아서 인도해오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이 먼저 길을 찾으시고 갈 길을 지시하시지 않았는가!

어디로 갈까?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모든 인간이 평생 묻는 질문이다.
그러나 성도는 지금까지 어떻게 왔는지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답이다.
하나님이 인도해주셨잖아!
아, 문제는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길을 몰라서 “우리가 어디로 가랴” 하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다.
아, 그것은 순종하기 싫어서 하는 핑계다.
그 분명한 길을 따르기 싫어서 가지 않겠다는 거부다.
내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있는가?
알고도 하지 않는 불순종이 문제이지 않는가?
질문을 잘 하자!
진실하게 질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