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7:1-11,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는 그들보다 수가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이 살고 있다.
이제 이들은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일곱 부족은 “진멸”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다.
진멸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기업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일곱 부족을 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가나안의 원주민이 이스라엘에게 진멸을 당하는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과 원한 관계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아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진멸은 그들의 사무치는 죄악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진멸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악에 영향받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진멸할 것”,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은
아마도 세상이 하나님과 그 백성을 마음 놓고 비판할 빌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비밀문서로 남기지 않으셨다.
나중에 신약시대에 이르게 되자 이 구절이 은근슬쩍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한 획도 변개될 수 없다고 확언하셨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즉 기독교의 잔인함을 조롱하고 비난해왔다.
관용과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오늘날의 시대 윤리와 풍조는
기독교를 얼마나 원시적이고 야만적으로 보는가!

그러나 이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셔서 악을 간과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공정한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이다.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진멸은 하나님께서 악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분명한 예를 보여주신다.
마지막에 공의로운 심판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너무도 지당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게 되는 것은
그들의 힘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지 않다.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가나안의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죄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므로 말미암아”서다.

그러므로 간단히 정리하면
심판은 자신의 죄 때문이요,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가나안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진멸을 당할 것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불공평하고 부당한 것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바로 가나안 일곱 족속의 자리에 설 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후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진멸의 심판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결국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듯이,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신약시대의 진리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이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구원의 아름다운 은혜를 영광스럽게 해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