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9:1-15, 나는 기도할 뿐이라)

이 시를 지은이는 다윗이라고 써있다.
다윗의 일생은 충분히 알려져 있으므로
그가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지었을지 예상할 수 있다.
대적에게 쫓기고 공격을 받았던 위기가 그에게 참 많았다.
그가 일방적으로, “까닭 없이” 고난을 당했던 경우는
사울 왕에게 쫓기던 일, 그리고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맞았던 때다.

두 경우 모두 다윗은 대적에게 끝까지 선의로 대했다.
그는 사울을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 존대했고,
압살롬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아들로 대했지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본문의 시는 아마도 이 둘 중 하나의 경우에 쓰였을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 대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나를(그를) 대적”하고 있다.
그가 베푼 “선”과 “사랑”을 그들은 “악”과 “미워함”으로 갚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억울한 상황이다.
이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맞서 대적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바로 “기도”였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리고 다윗이 한 기도가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대적에 대한 ‘저주의 기도’다.
아, 차마 읽기가 두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과 다윗의 일생을 아는 한에서
이것은 모순되는 기도가 아니다.
선대하고 사랑한 자에게서 악과 증오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괴롭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다윗은 그 고통스러운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로 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기도할 뿐”임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아뢰고 있다.
그것이 기도다.
기도는 미화된 수사학이 아니다.
정직하게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다.
설령 대적에게 저주스러운 마음이 들어도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면 기도다.
다윗은 대적에게 전혀 적대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에게 말로라도 위협하지 않는다.
심지어 저주를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의 탄식을 토로한다.
그가 당하는 억울함을 저주로 토설한다.
하나님 앞에서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것이 기도다.
그것이 바른 기도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하실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꿔주실 것이다.

둘째, 성경이 사람에 의해서 쓰이지만 그 저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한다면,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윗이 불의하게 당하는 것을 보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떤 판단을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악한 자를 오래도록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감화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끝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마땅히 징계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성경 기자로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

셋째, 이 기도는 대적에 대해 하나님께 아뢰는 말씀이지만,
얼마든지 나를 향해 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억울하게 봉변을 당하기만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며 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죄인임을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정확히 판단하실 때에 나는 당하는 자이기보다 가하는 자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면 다윗의 이 기도는 내가 들어야 할, 나를 향한 고발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경고의 말씀이다.

아, 내가 이 저주의 말씀을 들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만일 내가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훈계를 듣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면,
아직 살아 있어도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나는 이 말씀을 들었으므로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결과를 낳는 것인가를 알고,
얼마나 남을 괴롭히는 것인가를 알고,
참으로 회개하고 조심하고 깨어서 거룩한 자로 살도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 기도를 들었으므로
내가 조금도 거짓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는 정직한 기도를 드려야 할 담대함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