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6:1-12, 홍해에서 벌어진 일)

시편 105편과 같이 이 시도 출애굽 사건을 소재로 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사의 출발점이요 구약의 구속사에서 근거가 된다.
출애굽은 글자 그대로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사건이다.
그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역사인가!
해방이란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드물지 않은 것이지만
그 과정이 이스라엘과 비교가 될 나라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랍고 신비한 이적이었다.

그러나 시편 106편은 그 사건을 찬란한 영광의 자랑거리로가 아니라
부끄러운 죄의 고백으로 노래한다.
출애굽 사건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이 죄투성이였다.
흔히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부족함과 죄악을 기억하는 것은
광야 40년 동안의 불순종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죄의 기억이 얼마나 철저한지
홍해를 건너는 순간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즉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초토화시켰던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홍해에서 거역하였”다.
그렇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애굽의 환송을 받으며 해방되었지만
홍해가 앞을 가로막자 벌써 불평과 원망을 토해낸다.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입에 붙어 있던 불평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애굽기 14:12)였다.
이 시는 이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홍해는 갈라져 이스라엘의 해방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출애굽은 이루어졌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된 일이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셨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하는 독재자인가?
하나님이 속이 좁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고귀하고 정당한가?
‘이스라엘의 이름을 위하여’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인가?
조금 조야한 비유이지만,
운동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즉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1등을 하는 것과
‘조국의 이름을 위하여’, 즉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상을 타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는 글자 그대로 1등의 영예가 자기에게만 돌아간다.
그러나 ‘조국의 이름을 위하여’는 그 영예가 조국의 것이 된다.
같은 동포 모든 사람이 그 영광을 나눠 갖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란 모든 것을 포함하며,
모든 것 위에 있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즉 모든 것의 명예와 이익과 자랑이 여기에 포함된다.
하나님은 나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만유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편 23편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한다.
이것은 나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예로, 영광으로 드높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이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지를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