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0:1-8,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자” 에스라.
그는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백성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자다.
그는 성전의 재건, 즉 예배의 회복에 이어
유다가 말씀의 교육을 통해 진정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재출발하는 일에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학자요 제사장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실패한 듯 보인다.
에스라 자신은 율법에 통달한 자요, 그에 따라 살려고 최선의 애를 쓰는 자다.
그는 죄에 얼마나 민감하겠는가!
그런데 그가 백성을 가르쳤지만
그들 가운데 집단적인 이방인과의 통혼, 곧 음행을 의미하는 더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단지 오늘날의 국제결혼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방인과의 통혼이 곧 우상숭배의 지름길인 것이다.
그 위대한 왕, 잠언을 쓴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을 맞아들이면서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이지 않았는가!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통혼을 통해 자녀가 있는 집도 있는 것을 볼 때
이 일이 지금 막 시작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몇 년째 진행된 일이다.
그런데 에스라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로서 백성들을, 특히 지도자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가운데도 이방인과 통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은 자도 있다.
그러면 에스라에게서 율법 교육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집에서는 금지된 결혼이 계속 되고 있고
에스라의 성경공부에는 버젓이 참석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이 사실을 방백들이 알려주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문제는 에스라의 둔감이 아니라 백성들의 완전한 이중생활일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어긋난 일상을 살면서 에스라 앞에서는 율법을 배우는 신실한 학도다.

아, 이런 일이 내게 비일비재하다.
나의 장기는 이중성이다.
위선이요 외식이다.
내가 사모하는 것은 거룩함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경건한 모양 아닌가!
내가 그토록 바라는 것은 죄의 쾌락 아닌가!
나는 이 두 가지를 포기하지 않으며,
즉 죄가 탄로나지 않으며 위장된 경건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아닌가!

이러한 때 흔한 전략은 다른 사람의 비난이다.
그러면 나는 의롭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통하지 않았다.
에스라의 탄식과 금식과 회개와 기도는 “많은 백성”의 “큰 무리”의 회개로 합해졌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고백했다.
그들 가운데는 실제로 그 범죄를 행한 자도 있겠지만
에스라와 같이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동일시하는 자도 있다.
에스라도 죄지은 자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리이까”라고 기도한다.
그의 고백은 “우리”의 죄다.
나를 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에스라 자신이 포함된 “우리”의 범죄다.
그리고 에스라와 같이 성전 앞에 나아온 “많은 백성”도 “우리”의 죄를 통회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다시금 받겠다고 언약한다.
사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였다.
아,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는 ‘그들’의 죄를 고발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즉 ‘나’의 죄의 심각함을 아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