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8:1-20, 아하와 강가에서 사흘)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로 에스라와 함께 유다로 귀환하는 무리는
고레스 왕 원년에 바벨론에서 해방된 제1진보다 약 80년 뒤예수
그리고 성전이 완공된 지 50년 지나서 돌아온 것이다.
즉 이들은 유다 귀환 백성들 가운데 신진 세대라 할 수 있다.
벌써 80~50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이들 가운데 이미 여러 세대가 차이 난다.
그동안에 첫 귀환자들 가운데 있었던 “첫 성전을 보았”던 나이 많은 족장들,
즉 유다의 멸망을 몸소 겪었던 노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다.
제1진 중에 젊고 어렸던 자들이 이제는 가장 연장자들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또 새로운 세대가 도착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공동체로 부르실 때
당연히 그 안에 여러 세대의 범위를 허락하신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란 특정한 공통점을 가진 자들만의 전문 집단이 아니다.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나이에서 모든 세대가 포함된다.
교회 안에서 나이 차이가 나는 세대 간의 연합은 참으로 중요하다.
세상은 ─결국 인간으로서 다 똑같으면서도─ 노년과 장년과 청년과 유년의 세대 차이를 매우 단절적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인간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권능은 세대 간의 차이를 오히려 더욱 든든한 공동체의 기반으로 만드신다.
차이는 곧 다양성이 되고 서로를 더욱 보강하는 힘이 된다.
세상이 나누는 세대의 차이가 교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
예수의 피가 그깟 세대 차이를 하나 되게 하지 못할까!

에스라는 상당히 오랜만에 다시 해방되는 유다의 귀환 백성을 이끌고 갈 책임이 있다.
매년 이 행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주 벌어지는 일이어서 늘 배우고 누적되었던 것에 대 이동의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라는 사실 이전의 세대로부터 귀환에 대해서 직접 전수받은 교육이 없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신중하고 지혜롭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귀환 대열을 이끈다.
그가 간구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그와 이 무리와 함께 하고 있다.

에스라는 함께 떠나는 무리를 정확히 파악한다.
그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가 정확히 조사되고 기명된다.
그는 조급한 마음으로 무작정 떠나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이 거사, 즉 해방과 귀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얼마나 흥분되고 조급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에스라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바벨론을 떠나기 전에 백성들을 철저히 점검한다.
백성들은 점검을 위해서 아하와 강가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
혹시 아닥사스다 왕이 변심할지 모르므로 우선 빨리 바벨론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은 그에게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왕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사흘 동안 에스라는 특별히 레위 사람들이 있는지 살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이기 때문이다.
즉 에스라는 귀환의 목적이 어디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러 돌아간다.
단순히 정치적 해방과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회복이요, 곧 성전의 재건이다.
거기에 레위인의 역할이 지대하다.

그리하여 이 사흘 동안 에스라는 족장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레위 자손을 모아왔다.
그냥 인원점검이 아니라 모자란 자를 보충까지 한 것이니 사흘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시간이 지체되어도 된다.
아니 시간을 들여서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 성공적 결과에 집착하기 쉬운 사역에서도
오히려 ‘아하와 강가에서의 사흘’과 같이 더 점검하고 보충하는 일이 필요하다.
매일의 말씀 묵상도 ‘아하와 강가에서의 사흘’이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업적주의에, 즉 자기중심과 자기공로에 빠진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요
그것을 위한 준비를 위해서는 ‘아하와 강가에서 사흘’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오늘 너무 서두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