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8:21-36, 길에서)

에스라의 일행은 바벨론(바사)에서 해방되어 유다로 귀환하도록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그저 이들의 몸만 이동하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몸이 이동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제 말씀에 기록된 인원수를 보면 남자만 1484명,
그러면 약 3000명이 되는 큰 무리다.
이들의 이동은 1월 12일에 출발하여 5월 1일에 도착하는 약 110일간의 대 장정이다.
여기에는 어린 아이도 있고 그들 자신의 소유도 있으며,
특히 아닥사스다 왕이 돌려준 옛 성전의 귀금속 기구들이 있다.
이것은 얼마든지 도적들의 약탈감이 될 수 있다.
이들에게 “평탄한 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 대열의 안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군사력의 동원이다.
왜 아닥사스다 왕은 그 많은 보물들을 돌려주면서
유다의 안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유다 백성의 2차 귀환에 최대한의 선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는 이동 중의 안전도 보장해 주었어야 한다.
그러나 에스라는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다.

에스라는 해방과 귀환이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의 성취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유다로의 귀환은 왕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도될 것이다.
안전도 평안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에스라󰡕에서 거듭 강조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손”이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왕에게 보병과 마병을 부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손으로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결코 당당한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빚을 받는 자의 당당함이 아니다.
종에게 명령하는 주인의 권한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식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기도는 혼자 골방에서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공동체 전체에게 해당되는 일을 위해서는 당연히 그 공동체 전체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한다.
여기 아하와 강가에서 사흘 동안 유다의 귀환 백성은 금식하며 함께 기도했다.

이 공동체는 이제 “길”을 떠나는 중이다.
이들은 넉 달 간 “길에서” 지낼 것이다.
첫 번째 출애굽 사건은 사실 이보다 더 짧은 구간의 이동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범죄하므로 그것이 40년으로 늘어났다.
만일 지금 에스라의 공동체도 “길에서” 어떠한 잘못을 범한다면
40년이 걸릴지, 50년이 소요될지 모른다.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가!

실은 모든 길이 이와 같다.
인생에서 모든 길에 “하나님의 손”이 베푸시는 선하심이 필요하다.
모든 길이 넉 달이 걸릴 수도 있고 40년으로 지체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길에서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유다는 지금 유람하려고 길을 나선 것이 아니다.
40년을 배회해도 되는 길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목적지가 있고 사명이 있다.
모든 성도의 인생이 이와 같지 않은가!
성도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요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상을 중보하는 사명을 가진 자가 아닌가!
그러면 “길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손”이 베푸시는 선하신 권능이 필요한가!
성도는 그 사명을 위해 “길에서” “스스로 겸비”하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