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7:12-26, 그런즉 우리가)

겨울철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다.
바울이 험난한 상황을 예상하였지만 백부장도 선장도 선주도 듣지 않았다가
결국 바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일시적으로 순풍이 불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은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은 곧 역전되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다.

바울이 난항을 예상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였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지시는 나중에 언급된다.
만일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셨다면 바울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상식의 차원에서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뱃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항해의 경험은 충분히 있었고,
무엇보다 겨울철 항해의 어려움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무역을 하는 선주의 경제적 욕구와
항해 실력을 자신하는 선장과
임무를 완수하려는 백부장의 과욕이 상식을 거슬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지지하는 자가 더 많았다.
바울은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일단 논쟁을 피했지만
성도는 대체로 시세의 주류에 역류하는 자다.
성도는 좁은 길로 간다.
사실은 바울이 더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이 로마에 가도록 하나님이 이 항해를 인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유라굴로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흘만에 배의 기구를 다 내버려야 할 정도가 되었고,
그것은 전혀 효력이 없었다.
그 뒤로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채 낮과 밤이 동일하게 어둡고 풍랑은 거세기만 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기진맥진함과 절망과 무력함에 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도는 누구인가?
좁은 길을 가는 자요, 시류에 역류하는 자다.
모두 절망할 때 소망을 말하는 자요, 목표를 잃었을 때 분명한 조처를 취하는 자다.

물론 남들과 달라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과 다른 것이 곧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름이 사람에게서 오는가 하나님께로서 오는가 하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지 않고 그냥 인간적인 반항심으로 무조건 역류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은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
바울은 이번에 분명히 하나님의 지시를 들었다.

바울이 들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이 배의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나리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 광풍에 희생되지 않고 목적지인 로마까지 항해를 할 것이다.
혹시 이것만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 배 안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자가 바울 말고 또 있을까?
모두 변을 당해도 바울 혼자 당당하게 살아나 로마에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일까?
아마 속 좁은 자의 간증은 이것으로 마쳐도 충분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배 안의 모든 사람에 대해 구원의 계획을 가지셨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이들이 몰살되어도 좋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그에게 주셨다고 약속하셨다.
그들이 바울의 종이 된다는 뜻이겠는가?
바울의 손은 노예소유주의 손이 아니다.
그의 손은 권력자의 손이 아니다.
바울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요 그의 손은 곧 생명의 손이다.
바울의 손에 들어가면 복음이 주는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그것을 위해 주께서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듯이
지금 여기 있는 뱃사람들도 바울에게 주셨다.
아니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면
지금 이 광풍의 자리에서도 생명의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은 바울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장해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외친다.
이제 그가 선주요 선장이요 백부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애초부터 이 배의 선주요 선장이요 이 호송단의 백부장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이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즉 ‘우리가 이 광풍에서 벗어나 안전한 데에 이르리라’
이 결론에서 두 말이 핵심이다.
“우리”라는 단어와 “걸리리라”(구출되리라)는 말이다.
바울은 “우리”라고 하였다.
어제 본문에서 이 글의 필자인 누가가 이 단어를 쓸 때 ―“우리가 배를 타고”―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형제들이었다.
죄수인 바울 혼자 압송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형제들이 동행한다.
그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너희는 물에 빠져 죽고 예수 믿는 “우리”는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우리”는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다.
바울의 동역자요 형제요 예수 믿는 성도만이 아니라
바울의 제의를 무시했던 백부장, 선장, 선주를 포함하고 모든 병사들과 죄수들과 뱃사람과 나머지 모든 사람이 다 “우리”다.
하나님은 바울의 동역자 “우리”에서
이제 파선의 위기를 맞는 배 안의 모든 사람을 “우리”라고 하시는 데로 나아가신다.
아,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우리”로 초대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