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1-18, 그 눈을 뜨게 하여)

바울이 총독과 왕 앞에서 변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특별한 기회였다.
한 피의자가 정식 재판의 자리가 아니라 사적으로 총독과 왕 앞에서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있다니!
그것은 참으로 묘한 자리였다.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자리다.

바울은 자신이 심문받게 되는 이유를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이다.
바울은 그것을 소망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의 무지와 불신에 의해서 된 일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가 누구냐 하는 것인데,
바울은 예수가 부활함으로 그가 구세주임을 입증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도 처음에는 믿지 않고 오히려 박해했지만 결국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믿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바울의 이야기는 그가 예수를 만나게 된 경위이며 예수를 믿게 된 과정의 보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울을 만난 예수께서 그에게 주신 분부를 전함으로
과연 복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그 전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들이 눈이 먼 상태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눈을 뜨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둠 속에 있다.
이제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예수의 분부요 바울이 받은 사명이다.
어둠과 빛, 이것은 문학과 일상에서 표현하는 관례적인 용법을 훨씬 넘어선다.
주님은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풀어 설명하신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다.
그들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문명이 개화되지 않았거나 양심에 찔리는 것이 많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사탄의 권세는 곧 죄의 지배다.
그리하여 인간은 죄인이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도덕과 철학과 종교적 노력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죄사함”만이 죄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곧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예수가 구세주로 보내심을 받았고 이제 그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

바울은 총독과 왕의 심기를 눈치 보며 길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의 ‘변명’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가 오해했던 구세주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세상의 구원에 대한 사명을 받았다.
바울은 예수의 분부대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자다.
지금 유대의 최고 권좌에서 바울의 증언을 듣고 있는 이 권세자들도 눈을 떠야 한다.

맹인들은 자신이 눈먼 것을 알기에 눈 뜨기를 소망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영적으로 눈멀었다고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오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들이 인간의 눈먼 상태를 지적해줘야 한다.
왕과 총독은 아마도 정치적 호기심으로 한 서민의 말을 들을 기회를 만들었겠지만
그들은 지금 영적 진실의 순간에 나아온 것이다.
지금 재판을 받고 심문받는 사람은 바울이 아니다.
오히려 총독과 왕이 심문의 자리에 와있다.
그들은 자신이 눈을 뜨지 못하고 있으며 영적 맹인인 것을 대면하고 고백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은 눈을 떠야 하는 맹인으로 앉아있다.

세상은 예수 앞에서 법정에 서는 것이다.
그것은 눈을 떠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인에서 죄사함으로, 속된 자에서 거룩한 자로 돌아서는 자리다.
얼마나 은혜의 순간인가!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면 얼마나 비참한 판결(심판)의 순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