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5:11-22,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예레미야애가는 끝까지 탄식하며 끝까지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것은 사실 지당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고 끝까지, 참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했고,
그에 마땅하게 이방 강대국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다가 멸망한다.
그 직후의 상황에서 선지자가 하나님께 울며 탄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서 그 어떤 소망과 낙관을 섣불리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궁극적으로 유다의 죄를 가벼이 여기는 셈이 된다.

이 짧은 책의 마지막 부분은 여느 선지서나 시편과 같이
고통과 탄식 뒤의 소망과 기대를 비추지 않는다.
여자들은 욕보임을 당하고 남자들은 노예가 되고 아이들까지 노역을 하고 있다.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이 지배한다.
거룩한 산 시온이 황폐하여 여우의 서식지가 되었다.
아, 이때 선지자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스런 미래를 노래할 수 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변치 않는 진리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다.
더구나 죄인들의 덧없는 삶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더욱더 찬양받으실 제목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는 영원하심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잊으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잊으신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그 영원하심이 우리를 잊으시는 영원하심이라면,
얼마나 기가 막히는가!
이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

그리하여 선지자의 간구는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이 말은 조건부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이키시면 내가 돌아가겠다고 하나님께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잊으셨을까 두려워하는 중에 어디 그런 객기를 부리겠는가!
선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하나님께 돌아갈 생각은 안 하고 나를 돌이켜 주시면 돌아가 주겠다고 선심 쓰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러나 더욱더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는
우리가 회개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히 잊으실 정도를 큰 죄를 진 자가
어찌 내가 지금 하나님께 돌아가니 나를 맞아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종으로 여기는 꼴이다.
내가 행차하니 나를 보좌하라고?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영원히 잊으실 만한 죄를 지은 내가
어찌 하나님께 돌아갈 테니 문 열어놓으라고 마치 주인이 하인에게 지시하듯이 하겠는가.
아, 선지자는 죄가 얼마나 큰지 안다.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간구할 뿐이다.
오, 하나님! “우리를 돌이키소서”
주께서 돌이키셔야 우리가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의 기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