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1:12-22,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유다의 멸망, 예루살렘의 파괴는 원수들에게는 노리개가 되었고
백성에게는 고통과 수치가 되었고,
선지자에게는 회개와 탄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 탄원에 하나님의 응답은 아직 없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그를, 예루살렘을, 유다를 위로하는 자가 없다.

아마도 그리하여 탄식자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붙들고 말한다.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것이 있는가 볼지어다”
이 말은 ‘너희는 고통스럽지 아니하냐?’는 물음이다.
‘나의 고통을 너희가 아느냐?’는 질문이다.
그것은 우선 내 고통을 알아달라는, 즉 위로해달라는 부탁일 수도 있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더욱 괴롭겠는가.
제발 누군가 나를 알아봐주기를, 나의 고통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너희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란 무엇인가?
이 탄식자는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그는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그가 하나님을 “반역”하였음을 안다.
그리고 고백한다.
그의 고통은 그것의 마땅한 대가다.
그렇다면 그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이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너희들도 혹시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았는가?’
즉 ‘너희는 하나님께 죄를 짓고 환난 가운데 있는 나와 다르냐?’
‘혹시 너희도 나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았느냐?’
‘그러면 너희도 나와 똑같은 고초를 격을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자신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며 세상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혼자만 왜 고통을 당하느냐고 씩씩 거리며 아무나 붙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탄식자의 탄원이지만,
사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그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나는 정말 무관한가?’
‘나도 고통받을 일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
‘나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지 않았는가?’라고 자문하며 자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본문의 탄식자는 바로 나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는 당연히 내가 포함된다.
아예 “모든 사람”이라고 했다.
누가 예외될 수 있겠는가.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아, 내게 정면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너는 이 일에 무관하냐?’
‘너는 무사할 것 같으냐?’

그렇다.
나는 무관하지 않다.
나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반역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며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그리고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나는 이제 “탄식하는” 자를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그를 조롱하며, 무시하며, 그를 돌보지 않을 자격이 없다.
나는 죄의 당사자다.
내가 바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만큼 곤고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 내가 어떻게 남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