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22-35,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는 자)

예루살렘 회의의 최종결정은 이러 했다.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써만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구원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예수의 은혜 안에서 인종의 차별은 없으므로 유대인에게도 할례는 구원의 전제가 되지 않는다.─
이방인에게는 낯설면서 쉽게 범할 수 있는 몇 가지 죄에 대해 강조를 한다.
그것도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결과로서다.
이러한 결정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 회의의 권위를 위임받은 두 사람,
유다와 실라를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안디옥으로 파송한다.

이때 사도와 장로와 교회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로 강조한다.
그것은 예루살렘 회의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때 그 권위의 근거이기도 하고,
안디옥의 두 사도를 신뢰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두 사도의 증언은 회의에서 권위있게 인정되었고 결정에 반영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만일 바나바와 바울이 이러한 자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보고와 증언은 권위가 없다.
아무리 그들이 기적과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더라도
정작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권위를 두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만을 높인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권위와 근거는 자신에게 있다.
자신이 원하므로, 자신을 위하여, 이것이 어떤 생각과 행동의 동기와 목표가 된다.
그러므로 서로 충돌이 생긴다.
각각 자신이 기준이므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만일 진리가 그런 식으로 주장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이 진리인 것은 자기 생각과 경험에 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약속하셨고 행하신 일에 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권위와 기준을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도들은 그 반대였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교회 안에서의 기득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였고 그것을 전했고 그것을 위해 살고 죽는다.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도 바로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요 권위였다.
그렇지 않다면 다수결이든 세력경쟁이든 사람의 의결 원리에 따라 결정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사도와 장로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로서
함께 그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와 가르침과 하신 일에 따라 해결하였다.

그리고 그 권위에 의해 안디옥에 파송된 두 사람,
유다와 실라도 자신들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해서만 행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사명─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권위있게 전하는 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갔다.
그들은 거기서, 변방 안디옥에서 ‘예루살렘’ 사람의 권위를 행세하지 않았다.
권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었고
그리하여 그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만이 그 권위를 따르는 것이었다.
사람의 권위, 중앙의 권위, 세력의 권위, 이런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과 전혀 관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엇을 행세하려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나의 권위를 주장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권위가 있는데 나는 주를 위해 내 생명을 아끼지 않는가?
너무 아끼고 있지 않은가?
마치 그것이 최종, 최고의 권위가 있기나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