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 12-21, 말씀과의 일치)

예루살렘 모임은 “많은 변론”이 오고간 회의였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아닌가,
그 문제를 위해 많은 이야기가 나누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말의 시합이 아니었다.
아, 교회에서도 그러기가 얼마나 쉬운가!
말을 잘 하는 사람, 목소리가 큰 사람, 이미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말이 이기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와 형제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집중하였고
그것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귀를 기울였다.

베드로가 먼저 말했고, 바나바와 바울이 하는 말도 들었다.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진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역사는 중심부가 주변부를 지배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그러한 인간적 세력관계가 전혀 유효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의 삶으로 입증된 성령의 역사였다.

그리하여 바나나와 바울이 말을 할 때 모두가 “가만히” 들었다.
그 태도는 베드로의 말을 들을 때와 같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두 사도를 우열로 구분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말할 때는 조용히 경청하고 변방의 사람들이 말할 때는 흘려서 듣고,
그러지 않았다.
이 회의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형제들이 경청한 것은 세련된 토론예절의 과시가 아니었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들으려 한다.
만일 사도가 하는 말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반박되고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무명의 형제가 하는 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되면 잘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한 일이 이 회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 것,
이것은 공동체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그리하여 회의는 다수결이나 만장일치, 또는 유력자에 의한 결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정은 민주적으로, 또는 권위주의적으로 내려지지 않았다.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한 형제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만 민감하여
그들이 무엇을 순종해야 할지에서 일치했다.
야고보가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아닌가,
이것이 거기 모인 자들이 동의할 것인가 아닌가의 유일한 기준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가 다 “선지자의 말씀”과 “일치”하므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함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회의는 그렇게 결정되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즉 이들은 모두 “선지자들의 말씀”에 “일치”하는가의 여부가 기준인 것과,
베드로와 바나바와 바울의 말이 바로 그 “말씀”에 “일치”한다는 사실에 “일치”했다.

이것이 신학적 논쟁의 핵심 사안이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써만 얻는 것이므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결론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한 가지 부차적인 제안을 한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죽인 것과 피를 (마시는 일을) 멀리 하라”는 제의다.
이것은 할례를 대체하는 또 다른 율법인가?
결국 예수를 믿는 데 인간의 행위가 요구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이미 할례 문제에서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치를 어떠한 조건도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제안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다.
이 사안들 가운데 명확히 죄와 관련된 것은 당연히 구원받은 자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이다.
또한 건덕의 차원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서 의미가 있다.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구원을 받은 자는 구원받은 자로서 ─구원받은 자 답게─ 살아야 한다.

초대교회는 예수 믿는 한 개인이, 그 공동체인 교회가,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이,
한 지역 교회 안에뿐 아니라 전체의 회의가
어떻게 새롭게 변화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모든 일의 핵심과 바탕에 ‘말씀과의 일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