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1-11, 차별 없는 은혜)

복음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나누었다.
그런데 믿는 이 가운데도 아직은 하나가 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 우선 전해졌고 예수님은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과 연속성을 가지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약식으로 구원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제 인종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데에는 인정을 했지만
율법이 구원의 전제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것은 신학적인 문제였다.
사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가 무엇이며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바가 누구를 위함이며
성령께서 지금 어떻게 역사를 하시는가를 보면 아주 분명해지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같이 만나서 말씀을 들춰 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의 증거들을 살펴보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상책이다.
예루살렘 회의는 바로 그 모임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증인으로 참석했다.
그것은 회의 참석을 위한 출장인가?
오늘날 표현으로 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출장은 (행사)현장에서만의 일로 간주된다.
거기까지 가는, 또한 돌아오는 과정은 출장의 업무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서 일만 잘 마무리하면 된다.
그러나 두 사도에게는 안디옥을 떠나면서부터 그들의 출장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사역과 사역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관광여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모두 사역의 장소였다.
두 사도는 가는 곳마다 교회에 들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했다.
그리고 기쁨을 나눴다.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많은 변론이 있었다.
변론 자체를 비신앙적인 것으로 여길 이유는 없다.
만일 자신의 생각만을 끝까지 고집하고 대화와 증거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논쟁이라면 그것은 신앙적이지 않다.
예루살렘 회의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자신의 성경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다른 해석과 경험을 증거로 삼아 전체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즉 열려있는 대화일 때 그것이 신앙적인 변론이다.

베드로는 성경과 성령의 역사 체험을 근거로 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 예수의 은혜를 강조했다.
인종 차별은 할례주장자들에게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인종과 무관하기는 해도
율법이 전제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없이도 구약의 율법만으로 구원이 가능하지 않은가!
율법에서 이미 이방인도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인과 동등해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주 예수의 은혜”다.
은혜는 사람의 행위가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할례받는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하신다.
구약에서부터 들려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께서 사람의 행위라는 조건 없이 주시는 선물, 곧 은혜다.

예루살렘 회의는 이렇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