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18, 믿는 자, 안 믿는 자, 잘못 믿는 자)

사도들의 “땅끝” 선교사역은 계속된다.
어디서나 거의 동일한 반응이 나타난다.
그것은 “무리가 나뉘”는 것이다.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이고니온에서는 이 구분이 극명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이 역시 있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도 믿지 못하게 하는 적극적인 반대자들도 있었다.
이미 다른 데서도 있던 일이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나머지 사람들, 특히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도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그 결과로 “시내의 무리가 나뉘”게 되었다.
이고니온 시는 사도들이 전한 예수를 믿는 자와
안 믿는자─그들은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박해자로 변신했다─로 분리된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 때부터 반대와 공격은 성도들의 “땅끝” 사역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이고니온에서의 소동─관리까지 동원하여 사도들을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도
복음을 그 다음 도시로 나아가게 했다.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로 사도들은 나아갔다.

루스드라에서의 사역은 유대인의 회당보다는 병자의 치유로 시작되었다.
바울이 걷지 못하는 자에게 일어나라 명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이 벌어졌다.
그러자 또 다른 종류의 소동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나뉨과는 다른 일이었다.
그들은 두 사도를 그들의 신화 속의 신으로 추앙하며 높였다.
아, 그리스신화!
수백 년 전의 조상들이 문학으로 지어낸 신화를 그들은 전설로 신비한 이야기로 전수하고 있었다.
그들이 믿을 증거가 뭐가 있었겠는가!
옛날에는 영웅들이 신화를 지어냈는데 이제는 로마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신화는 그저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그들 앞에 그 신화 속의 신들이 재현된 듯 신비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아, 그 옛날의 신화가 사실인 것이다!
그들은 그 순간 신화를 사실로 믿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사도를 신화 속의 신들로 높이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었다.
그들은 잘못 믿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를 아직 믿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대적하는 자는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사도들을 환영하고 신으로 높인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사도들을 박해하지 않고 환대했으니 그들은 이제 사도들과 한편이 되었는가?
그들은 예수 믿는 자들과 한편인가?
아니다.
사도들은 박해받지 않는 것, 환영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편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얻기 위해 “땅끝”까지 가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의 잘못된 믿음이 “헛된 일”이라고 정확히 알려주었다.
사람을 숭배하는 것, 신기한 일로 인해 종교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옛 신화들의 내용이요 본질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가져야 한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피조물의 일이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나와 “같은 성정을 가진” 피조물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헛된 일”이다!

사도들은 그들이 공격하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대견하고 고마우니 잠깐 진실을 유보하는 작전을 펴지 않았다.
일단 우리 편으로 간주하고 조금씩 나중에 복음에 대해 말할 전략을 세우지 않았다.
처음부터 진리여야 한다.
끝까지 진리여야 한다.
부분적인 진리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작전이나 전략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사도들은 복음을 헐값에 팔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진리를 증언했다.
그렇게 했기에 오늘날 한국에도 복음이 이르렀고 나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진리를 전하는 것이 나도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