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21-41, 공공 위의 하나님)

로마 총독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에서 시작된 예수교.
예수를 믿는 이들이 점점 제국의 동쪽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전적으로 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일이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 공무로 수행하는 일이 아니며,
속주인 유대의 왕이나 종교당국의 공적 업무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신앙에 따라 움직여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처음부터 공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다.
유대의 왕과 제사장, 산헤드린이 그들에 대항하는 행동을 취했고
아시아로 퍼져나가면서 역시 각 도시의 시행정부가 간여할 공무가 되었다.
그것은 공권력이 동원된 박해로 일관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신앙을 사적인 차원에서만 주관하시고 공적으로는 무관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개인을 움직이시는 것과 달리 공공, 공권력, 공적인 모든 차원의 것까지 다 주관하신다.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를 가두었던 예루살렘 종교당국의 공권력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산헤드린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에 의해 감옥 밖으로 나갔다.
바울도 그렇다.
그도 역시 감옥에 갇히고 채찍질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지진으로 옥문을 흔들고 간수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은 일이 벌어진 뒤에 보호의 차원에서만 발효되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공권력을 이용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오늘 본문의 경우가 그렇다.
바울의 복음 사역으로 인해 경제적인 위협을 받았다고 여긴 자들이 소요를 일으켰을 때
사실 그것은 공적인 절차를 통한 공무는 아니었다.
그거야말로 사적인 이해관계의 발로였다.
그러나 그것이 소요로 되면서 공공을 관장하는 공권력이 간여하기 시작한다.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의 배려도 역시 사실은 사적인 행위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그것을 또한 넘어서 역사하신다.
서기장이 이 소요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을 때
그것은 이제 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권력의 행사로 접어든다.
서기장인 “바울의 친구” 가운데 하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에 관계없이 그는 이 도시의 고위 관리로서 공권력을 행사할 의무와 권리가 있고
지금 그것을 행하고 있다.
그는 바울에 대한 사적인 관계 때문에 이 사건을 바울에게 유리하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공권력의 담당자로서 도시 행정의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있다.
문제는 이 소요가 아무리 많은 시민이 참여한 것이라 해도 공적으로는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는 사실이다.
즉 법적인 근거가 없는 “불법 집회”인 것이다.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정당한 공적 절차다.
공공성은 이러한 공적 절차에 권위를 둘 때 타당한 의미를 갖는다.
무조건 수만 많다고 공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 오늘날 이런 일이 우리에게서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는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한 공무원의 공적 책임 행사를 통해 역사하셨다.
여기서 바울이 체포되었는가, 복음 전도가 중단되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은 진정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신가,
이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장면을 생생한 중계로 보고 있다.
하나님은 공권력을 통해서 공적으로 정당하게 역사하신다.
물론 그것을 넘어서신다.
인간의 공공과 공권력과 공무와 공적 차원이란 한 사회의 사회적인 절차라는 시의적 한계를 갖는다.
인간 세상의 ‘공’은 사실 지극히 ‘사’적이다.
한 시대와 사회의 세력의 결과에 불과하다.
설령 만장일치가 된들 그것이 얼마나 ‘사’적이기 쉬운가!
오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이 ‘공’적이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만이 공의롭고 정당하며 의롭다.

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는 이 점에서 참으로 ‘공’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