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1-15,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

사도행전에서 여러 지역들이 언급되어 당연히 서로 비교될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직접 두 도시에 대한 비교가 언급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다른 곳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전도자들은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갔다.
회당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뜻을 풀어” 설명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는 일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었고 예수의 제자들이 어디서나 전하는 소식이었다.

유대인의 회당에 모이는 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알며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그리스도가 해를 받을 것에 대해서,
심지어 죽기까지 할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 사실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 영웅을 기다릴 뿐이었다.
구원자가 고난을 받거나 죽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자신들이 편한 대로만 상상하고 멋진 결과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하는 ─사실은 어디서나 복음 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그와 달랐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전했다.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죄의 값을 치르신다.
이 대속을 통해 죄인들이 면책되고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함으로써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고
또한 그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신다.
하나님은 죄의 대속 없이 공중에서 이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지 않으신다.
죄는 반드시 공의롭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용서가 가능하다.
또한 그리스도는 죄 없는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다.
죄인인 한 사람이 영웅적 죽음을 행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다.
세상을 구원할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한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대상에게 동일한 내용의 복음을 전했는데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반응이 달랐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다른 곳에서와 같이 두 부류로 나뉘었다.
“권함을 받고 ··· 따르”는 사람, 즉 믿는 자와,
믿지 않고 폭력으로 맞서는 자들이다.

베뢰아에서는 이와 달랐다.
그들은 “더 너그러워” 마음이 열려있었다.
그리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 결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이 한 부류의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반대자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일은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복음을 방해하러 원정 온 자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의 반대자들이 베뢰아에 반대자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사람으로서
더 큰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복음은 어디에서나 반대에 직면한다.
세상은 어둠 속에 있고 그것에 길이 들었고 밝은 빛을 싫어한다.
자신의 속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복음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즉각적인, 자발적인 반응으로서,
또는 다른 데로부터 영향을 받고 후차적으로, 복음에 대한 방해는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그의 제자들은 모든 박해를 견디며 이겨내어
복음은 갖은 방해 속에서도 땅끝까지 전파된다.
데살로니가에서든 베뢰아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