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36-16:5, 다시 가서 방문하자)

유대인의 할례 문제가 예루살렘 회의로 해결된 뒤에 안디옥 교회는 그것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갔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바나바가 바울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제의했다.
복음의 씨는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성장의 과정이 간과된다면 자칫 목적 없는 행동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열심히 전도하여 어디어디 다녔고 얼마나 회심했고 몇 개의 교회를 세웠고, 이러한 업적에 연연하기 쉽다.
그때 정말 한 사람의 구원보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나의 행동에 더 도취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아,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목적은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있다.
물론 그것은 결코 복음 전하는 자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도 또한 공적주의에 불과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회심과 결신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복음 전파자의 사명이다.

그리하여 바나바의 제의는 바로 재방문을 통한 믿음의 성장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분명히 안디옥 교회도─ 그에 동의하고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기로 했다.
이 목적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문제가 발생했다.
동행자의 목록에서 두 사도 사이에 이견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얼마든지 열려있는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공동체에서도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는 사실이 참 당황스럽다.
이것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보았던,
서로 말할 때 “가만히” 듣던 것과, 최종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 여부에 있는 것과는 다른 장면이다.
이 사건은 결코 아름다움으로 미화될 수 없다.
두 사도가 잘 합의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것은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설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두 가지를 더 봐야 할 것이 있는데,
첫째는 원래의 목적이 다툼을 통해서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싸우게 되면 애초의 목적도 잊고 이기는 데만 주력하고
의가 상한채 아예 결별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러나 두 사도는 각자의 원칙과 견해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는 일을 수행하는 일에 동일했다.
그리하여 이 목적을 아무도 포기하거나 변형하지 않았다.
이 목적은 두 사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둘째는 결국 이 다툼이 나중에 해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것을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묻어두고 각자의 길을 가거나,
영영 원수가 되어 결별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들은 서로 동역자로서 같은 길을 간다.
분명 이해와 화해가 ─용서도─ 있었을 것이다.

성도가 이견으로 다툴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대의─본래의 목적─가 훼손되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며,
또한 다시 연합하여 화해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다.
─아, 나 자신은 이러한 데에 참 성숙하지 못하다.─

두 사도는 목적에서는 동일했지만 동행자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수행 방법을 다르게 선택했다.
바나바는 처음에 출발했던 길을 되밟는 행로를 선택했고,
바울은 맨 마지막에 이르렀던 곳으로 먼저 가는 방식을 취했다.
나중에 바울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성령의 지시에 따라 경로를 바꾼다.
아마도, 바나바와 바울에게 이제는 각각의 사역을 맡기시는 것 같다.
이로써 복음 전파의 범위는 더욱 넓어질 것이다.

만일 이들의 출발점인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두 사도가 다툴 때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어느쪽의 길을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두 사람은 자기 뜻을 포기하고 그 길을 따랐을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나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성령의 지시에 따라 마게도냐로 방향을 바꾸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즉 두 사도 모두 성령의 직접적인 뜻에 전적으로 순복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분명할 때는 각자의 길이 나뉘지만
결국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두 배로 확대되는 일이 전개된다.
아, 인간의 다툼은 언제나 피해야 할 아름다운 일이 아닌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일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가, 일하고자 하는가, 죽으려 하는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