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7:1-10, 말씀은 듣지 않고 기도는 부탁하고)

요시야의 아들 가운데 세 명이나 왕이 되었다.
시드기야가 그 중 하나인데
그는 자신이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왕위가 다음 세대로 계승되지 않고 형제들 사이에서 맴돌고 있는 것도 이상하며,
왕의 임명이 심지어는 외국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것은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드기야와 신하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레미야에 문제를 돌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에게 여러 선지자가 있는데 꼭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사실은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자칭 선지자의 말은 잘 듣는다.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분간하는 아주 쉬운 척도가 이것일 수도 있다.
내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
물론 아주 믿음이 성숙한 성도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자동적으로 드는 수준까지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에 못 미친다.
무엇보다 때로는 그렇고 때로는 ―수가 틀리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나의 마음에 드는가, 내게 만족스러운가,
이런 것은 결코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는 데 기준이 될 수 없다.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죄와 씨름하는 우리의 본성을 볼 때
오히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시드기야는 하나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즉 예레미야의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위급한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더구나 그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거부했던 예레미야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부탁 아닌 명령을 한다.
아마도 이 두 자세가 여전히 아주 흔한 문제인 것 같다.
하나님 말씀 듣기는 싫어하면서 기도는 부탁한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나 기도를 하는 것 모두 나 자신이 할 일이다.
꼭 나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들으며,
역시 합심하여 기도하고 자신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부탁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안 하면서 말씀 듣기와 기도하기를 남에게 전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말씀도 그렇고 기도도 그렇고, 그렇게 하기가 매우 쉽다.

본문의 내용의 순서를 보면,
시드기야 왕의 즉위 ― 말씀을 듣지 않음 ― (바벨론의 침공) ― 예레미야에게 기도 부탁 ― 애굽의 등장으로 바벨론의 일단 후퇴 ― 하나님의 응답(에레미야에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애굽이 원군으로 등장한 뒤 바벨론이 물러나자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다른 내용이었다.
바벨론이 잠시 떠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드기야의 바람이 잠시 이루어진 것뿐이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애굽은 물러날 것이고 바벨론이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정복할 것이다!
유다가 사무치는 죄를 짓고 회개를 하지 않으므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을 거듭 듣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다.
이것은 시드기야의 생각과 뜻과 계획과 얼마나 다른가.

순종은 내 마음에 드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만족에 관계없이, 심지어는 싫어도 행하는 것이 순종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거듭 듣고 배우는 말씀이 이것이다.
형통과 마음의 만족에 속지 말라,
이것이다.
오히려 나를 쳐야 순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