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4:1-7, 재난 중에 평안?)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대에 패망의 때가 임하기를 바라거나 예측하는 왕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치욕이며 역사에 통탄할 무능자, 책임자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이 말을 이미 여러 차례 들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한 것이다.
그의 주변에 있는 신하들, 제사장, 선지자들은
예레미야와 정반대 되는 말을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시드기야가 듣기 좋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가 거부했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였다.
유다는 바벨론에 패망할 것이며, 그리로 끌려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패역한 죄를 끊임없이 범해온
유다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다.
하나님이 하실 만큼 다 하신 역사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서실 것이다.
마땅히 심판받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하신다.
그것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거듭 계시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은 시드기야 왕 개인의 앞날을 예고하신다.
그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망할 것이다.
그는 유다의 패배자로서 바벨론에 끌려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시드기야가 개인적으로 선대 받을 것이다.
그는 칼에 죽지 않을 것이며 “평안히 죽을 것”이다.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으로서
전에도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던 요시야 왕―그는 시드기야 왕의 아버지다―도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 시드기야는 비록 포로로 끌려가는 벌을 받지만
“평안히 죽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도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가 지론으로 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손에서 유다를 보호하실 것이므로 결코 패망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망하고 왕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왕은 선대를 받고
그의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평안한 죽음’을 그가 맞을 것이다.

이 일이 있기까지 시드기야는 이 말씀들을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지만,
과연 이 예언대로 역사는 이루어졌다.
시드기야 왕은 정말로 칼에 죽지 아니하고 평안히 죽는다.
그러면 시드기야는 결국 버티고 버티다가 백성들과 함께 고통의 길로 가게 되는데,
이때 그는 결국 평안히 죽는 것이 보장되므로 그는 이제 방자해져도 되는가?
그는 최종적으로 바벨론 포로라는 심판에서 면제된 자 같이 포로 가운데 평안히 죽을 것이므로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든 아니든 상관이 없는 것인가?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참으로 패역하고 어리석은 자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죄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삼는 참으로 비열한 자다.

이 말씀을 드디어 깨닫게 될 때, 또는 이 말씀이 이루어질 때
그는 무엇보다 회개해야 한다.
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구나.
내가 가장 큰 죄인인데 나는 백성들 가운데 가장 선대를 받는 포로가 되었구나.
이들의 고통이 나 때문이데 나는 평안히 죽는구나.
이것은 정말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며 회복시키기는 하나님의 은혜구나.
나의 삶은 그 은혜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확증하는 표징이구나.
이러한 깨달음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평안한 죽음.
이것은 누구나 바라는 이생에서의 마지막 형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패역한 인생 전체의 정당화를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직 회개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일 뿐이다.
재난 중에 평안을 만날 때 그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