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9:1-18, 시드기야의 눈)

아마도 시드기야의 ‘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눈이었을 것 같다.
그의 눈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을 보았다.
시드기야가 있던 자리에 이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이 앉게 된 것을 그는 보았다.
다행히 그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샛문을 빠져나가 도망갈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모든 것을 예의 주시하며 아라바를 향해 몸을 잽싸게 움직였다.
그러나 여리고 평원에서 그의 눈은 결국 바벨론 군대가 뒤쫓아온 것을 보게 된다.
그 눈은 그 군대에 의해 자기 주인(시드기야)이 사로잡히는 것을 본다.

눈이 제구실을 못 하였든, 다리가 제대로 달리지 못했든,
몸이 민첩하지 못했든, 어느 지체에게 얼마큼 더 큰 책임이 돌아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이 적병을 발견하는 순간,
그 눈의 주인의 몸뚱이 전체가 다 포획되고 만 것이다.
눈은 도망치고 다리는 사로잡히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든 잡히면 눈도 잡히게 마련이다.

그의 안전한 탈출을 성공하지 못하도록 결국 그의 눈은 제 기능을 못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의 눈은 이제 정말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아야 했다.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인 것이다.
눈은 바로 그 앞의 꺼풀을 닫아버리면 못 볼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다.
눈을 감느냐 뜨느냐에 따라 보고 안 보고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그러한 자유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을 권리도 잃었다.
아마도 특별한 장치로 그의 눈이 덮이지 않도록 열린 눈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바벨론의 심판은 유다의 왕으로 하여금 뜬 눈으로 모든 비극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문 이상의 고통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 그의 눈이 뽑혔다.
어차피 사로잡히고 끌려갈 것이면 눈이 먼저 뽑히고 장님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히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행했다.
그리하여 비극의 순서를 시드기야에게 가장 불행한 차례로 배열했다.
시드기야의 눈은 아들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그리고는 결국 시드기야의 몸에서 분리된다.
그렇게 눈의 생명은 끝난다.
어차피 뽑힐 것인데 그 눈의 망막에 모든 비극의 장면이 다 맺히게 한 뒤에야
눈은 최후를 맞는다.

시드기야의 눈은 참으로 주인을 못 모신 셈이다.
그 눈은 시드기야를 가장 괴롭게 한 지체다.
아, 그러나 그것은 눈의 잘못이 아니라 시드기야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눈이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다.
주인 때문에 모든 지체가 극한 고통을 당한다.
주인이 하나님 말씀을 어겼더니 그의 몸 전체, 모든 지체가 다 결딴났다.
그가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다면
그는 항복의 굴욕을 겪었어도 이러한 고통과 비극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심판에 순종하므로 그는 진정으로 살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항복보다 더 굴욕적이고 더욱더 고통스러운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