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8:14-28, 시드기야의 두려움)

시드기야 왕은 몹시 불안하다.
그는 둘 사이에 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고관들과 예레미야 사이에 있다.
고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는 자들이며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거듭 부르짖고 있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수가 틀리면 죽일 수도 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순종할 마음은 없다.
그것은 자기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는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뿐이다.

그는 오직 불안하다.
그 불안의 핵심은 유다의 안녕을 위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그는 자기 목숨의 부지 여부 때문에 두렵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말이 확실하다면 바벨론이 결국 유다를 함락할 것이요
그러면 먼저 바벨론에게 항복한 사람들이 기득권을 갖게 될 것이요
그들이 자신을 바벨론 왕에 넘기고 자신은 그들에게 조롱당할 것이다.
그 상황이 두렵다.

예레미야의 말은 시드기야의 죽음과 생명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는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으면 죽고 항복하면 산다.
죽고 살고에 초점을 맞추면 시드기야 왕에게는 살길이 분명히 있다.
물론 왕으로서 ―당연히 백성들에게도― 남의 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얼마나 굴욕적인가.
그러나 그 치욕은 무엇에 대한 고려 때문인가?
왕이든 백성이든 항복을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다.
그는 철저히 정치적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에게는 위신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세상에서 언제나 중요했던 문제다.
그러나 지금 유다는 그와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한 자들이다.
그들이 외국 군대 앞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죄 때문이다.
이것은 죄로 인해 받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므로 유다의 위기는 정치적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지금 시드기야가 고려할 것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영적 순종의 여부다.

더구나 하나님은 심판만 예고하시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구원도 약속하신다.
그것은 정치적 선택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기꺼이 순종하겠는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굴욕적이고 위신을 구기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에 의한 조롱이 문제인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시드기야가 계속 집착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정치적으로 살아남을까, 이것이다.
그는 오로지 정치적 체면만이 문제다.
바로 그것을 버리라는 것이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거듭되는 지적이다.

사실 위신과 체면, 즉 사람들 앞에서 외모는 모든 사람들이 중시하는 문제다.
아마도 그것에 다 절절맨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렵고, 거기서 만족하면 세상은 성공한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문제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의 십자가는 얼마나 치욕적인가.
그것은 예수의 체면과 위신을 얼마나 구기는 일인가.
예수님은 조금도, 전혀 정치적인 계산을 하지 않으셨고
정치적으로 살길을 찾지 않으셨고 정치적인 창피함에 개의치 않으셨다.
심지어는 예수의 승리인 부활마저도 정치적으로 결코 이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빌라도와 산헤드린 앞에 ‘짠’하고 나타나
그들이 굴욕을 당하게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예수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은 예수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고 사명이었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왕으로서 정치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해야 했다.
그는 둘 사이에서 계산할 것이 아니었다.
아, 이것은 왕의 문제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정치적이다.
아, 그런데 성도라고 하는 나도 아주 많은 경우에 둘 사이에서 여전히 머뭇거리며,
거기서 위신과 체면과 사람들 시선으로 염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 나, 시드기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