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8:1-13, 누가 생사를 주관하는가?)

예레미야가 외친 말씀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말이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실 것이며
그리하여 여기 남으면 죽고 항복해야 산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분명 죽음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서도 말했다.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이 앞에 있다. 선택하라’였다.
이 말에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 그동안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러나 심판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 가운데도 순종을 통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레미야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죄인 취급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로 상정한 것을 싫어했고,
아무리 생명을 말한다 해도 죽음(심판)이 전제되고,
예레미야가 말하는 생명이란 상식적으로 비민족적, 비애국적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레미야를 거북해하고 듣기 싫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여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의 말이 군사와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바벨론에게 패전하고 몰살당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헛소리가 유다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므로
예레미야를 처치하면 그들이 죽지 않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예레미야도 그렇고 반대자들(고관들)도 그렇고
모두 죽음과 생명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나쁜 것이고 생명이 답이요 목표다.
예레미야는 죄로 인해 죽을 것이요, 그러나 순종을 통해 산다는 것이다.
반대자들은 예레미야가 설치지 않으면 사기가 진작되어 죽음에 빠지지 않고,
그러므로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똑같이 생명을 위해 죽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지 않고 살 방법을 말하려 한다.
그러나 형식은 같아 보여도 내용에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생명과 죽음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가 하는 문제다.
생사를 누가 주관하는가?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예레미야는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며, 그를 통해 다시 살리신다,
즉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실 수 있다,
생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동시에 백성들은 생사에 대한 책임을 진다, 이것이다.
반대자들은 예레미야가 유다를 죽이려 하므로 자신들이 그것을 막아 백성들을 살릴 것이고
그러기 위해 그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에는 하나님이 없다.
이들의 생사에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 없다.
삶과 죽음은 예레미야와 자신들의 세력 관계, 정치적 힘겨루기에 달려 있다고 본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생사를 주관하시고,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생사를 주관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일단 예레미야의 말대로 되는지로 금방 나타날 수 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면
―지금 애굽의 원군으로 바벨론이 물러난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말이 불리하게 되었지만―
예레미야의 말이 맞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죽일 수 있으면 생사의 주권이 그들의 손에 있음이 입증된다.
그들의 말은 관철되었는가?
아니다.
왕으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죽이는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이의 말을 통해 왕의 마음이 바뀐다.
그 왕은 어제 말씀에서 예레미야가 탄원할 때 들어주지 않았던 자다.
그러나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
그러면 생사는 왕의 손이 주관하는 것인가?
아니다.
왕이 아니라 왕의 마음을 바꾸는 자가 생사를 주관한다.
왕은 동족의 고관들이 아니라 이방의 내시를 통해 결정을 번복한다.
아, 그가 이 일들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임을 제대로 알아차렸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정치적인 논의와 기 싸움이 생사의 결정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 위에서 ―그들의 손 아래서가 아니라― 주관되고 있는 것임을 그들이 인식했어야 하는데!
예레미야와 반대자들의 차이는 명확하며 그것이 결국 최종적으로 중요하다.
생사를 하나님이 주관하는가?
자기 손에 달려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