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7:11-21, 불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하다가
그 부르심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의 끊임없는 범죄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실 것이라고 전하고 다니는데,
실제로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그 예언대로 패망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 같더니
애굽 군대의 개입으로 일시에 전황이 급변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고 유다는 애굽의 원조로 구원을 받는 듯했으며
그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틀렸음이 입증되는 것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이제 예레미야는 노골적인 박해를 받는다.
유다의 패망을 선포하고 다니는 처음부터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고,
이제는 그를 마음껏 비웃고 공적으로 범죄자 취급을 해도 될 것이었다.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죄, 거짓말 유포죄,
심지어는 적과의 내통에다가 적진으로의 도주 음모 발각죄.

성문의 문지기가 그를 잡아 고발했고,
고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구타하고 투옥한다.
왕은 여전히 기회주의적이다.
그는 고관들과 예레미야의 가운데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이뤄지지 않아 유다가 패망하지 않아 좋고
성가신 예레미야가 틀린 것으로 드러나 자동적으로 죄인으로 몰릴 것이니 좋다.
그러면서도 혹시 하나님의 뜻이 뭐라고 계시되는지 엿보고는 싶다.
그가 일편단심 바라는 것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그에게 유리한 말을 하는 것이다.
즉 바벨론의 철수와 유다의 형통을 예레미야가 확증해주면 만사형통이다.
그러면 왕의 생각이 신적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사면초가라고 할까?
주위에 아무도 예레미야를 위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 적대자만 있으며,
현실의 상황은 전적으로 불리하다.
그의 적대자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이때 선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마도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앞설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라더니 왜 그대로 되지 않고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가?
하나님한테 속은 것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노신 것인가?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니 자신도 그렇게 되므로 부아가 날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듣고 그에 따라 사역해왔단 것에 일말의 의심도 없다.
그리하여 그는 전황의 소강상태를 틈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전에 하라고 하셨던 집안의 토지 거래 문제를 처리하러 나간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으로 보일 때에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과 믿음대로 사는 담대함이 내게 참으로 필요하다.
나는 조금만 수가 틀려도 아주 쉽게 짜증내고 불평하고 당황하고 흔들리는데
이것은 진실한 사역자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든든히 의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늘 변하기 마련인 상황에 시시각각 매달리는 조바심이 문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견고한 믿음을 위해 기도할 때다.

상황이 변화하면 하나님께 대해서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자세에서도 흔들리기 일쑤다.
안전책만 구하거나 ―도피한다― 이중적으로 되거나,
자기변호에 매달리거나, 자신의 말을 번복하거나,
자기편이 될 자를 모으기에 급급하거나 한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지 사람에게 의존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에 대해 정당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대체로 아주 쉽게 위축되는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 진리를 담대히 드러내는 신앙적 기개가 내게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