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2:36-44, 분노에서 정성으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는 것은
“유다 자손이 예로부터” 행했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격노”와 “노여움”과 “분”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느 속 좁은 독재자의 괴벽이 아니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변덕스런 신이 겁주는 용트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격노와 노여움과 분은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도 그들이 교훈을 듣지 아니”한 마땅한 결과였다.
바벨론 침공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었다.

어제 본문은 하나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로 시작하고,
바로 “그러므로”로 연결되어 유다를 바벨론의 손에 넘길 것을 선언한다.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패역한 유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러나”로 시작한다.
즉 어제 말씀과 다른 내용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의 죄에 대해 격노와 노여움과 분을 발하심으로
바벨론에 의한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구원하실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반전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이것이 “그러나”의 권능이요 진실이다.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신다.
“그러나”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격노하고 노여워하고 분하셨던 하나님의 돌이키심에는
어떠한 ‘뒤끝’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히려 유다의 구원과 회복에 온 힘을 다 기울이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만도 기적인데
하나님은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신다.
그들이 완전히 회복되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신다.
아, 하나님의 정성.
하나님께서 정성을 다하신다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유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된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이 “정성을 다하여” 새로 심은 나무라 할 수 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정성의 결과다.
하나님이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인데,
내가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살아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