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10-19, 이것이 나를 앎이냐?)

요시야 왕을 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유다의 왕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개혁자였지만 그 이후 마지막 네 명의 왕 가운데 셋이 그의 아들들이었으면서
모두 끝까지 악에서 돌이키지 않다가 망한다.
그들의 누적된 죄는 결국 유다의 멸망으로 귀결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일찍이 그것을 예고하셨지만
어쩌면 요시야가 죽은 뒤 마지막 22년 6개월 동안 유다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들의 결국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이 묻는 것은 이것이다.
‘이것이 나를 앎이냐?’
또는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이것은 동일한 질문이다.
그러나 대답이 정반대로 달라질 것이므로 그 의미는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 왕들의 아버지인 요시야가 행한 것을 들어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하고 묻는다.
즉 ‘이것이 바로 나를 아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요시야 이후의 왕들에게 적용하면
‘이것이 나를 앎이냐?’는 질문이 될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이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누군가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모르는지,
그것이 그의 마지막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생명이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는 ‘너는 산다’는 뜻이며,
‘이것이 나를 앎이냐?’는 질문은 ‘너는 죽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 질문을 하시며 판단하시는가?
요시야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반면에 요시야 이후의 왕들은 “불의로 집을 세우며”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신약에 의거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를 위하여” 살면서 말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자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자다.
자신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기를 위하여 산다면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 아닌가!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요
그것은 예수의 대속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원칙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그의 삶에서 판별된다.
즉 믿음은 삶으로 입증된다.
그러므로 내가 계속 되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내가 내 삶을 보고 물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앎이냐?’ 또는 ‘이것이 하나님을 앎이 아니냐?’
아, 나의 믿음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