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6:17-27, 복음으로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를
아직 그곳에 가보지 않은 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판단으로 사람들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다.
이 서신을 쓴 고린도는 로마에서 결코 가깝지 않다.
그러나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로마와 바울의 사역지를 왕래하는 동역자들이 많고,
그들을 통해 바울은 로마 교회를, 로마 교인들은 바울을 잘 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 교회가 빠질 수 있는 위험─배운 교훈에 거슬러 일으키는 분쟁─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고
그들이 잘하고 있는 것을 들어 칭찬하고 있다.
바울은 아직 몸으로는 로마에 가지 못했지만
충분히 영적 교제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이 곧 “성령의 교통하심”(고린도후서 13:13) 아닌가!

이 말씀을 보며 나의 교제는
너무 눈에 보이는 것, 눈으로 보는 것에 연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세상 속담─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에 종속된 삶 아닌가!
믿음의 교제, 성도의 관계는 그렇게 가시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성도에게는 기도의 교제가 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 나는 그와 영적 교제를 하는 것이므로
그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자주 본다고 해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없다면
진정한 교제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형제들을 위해 더욱 기도하자.
그들에 대해 더욱 알자.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은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바울은 “복음으로 ···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로마 교회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렇게 찬양과 기도가 하나가 된다.

이 기도는 사실 나를 위한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복음으로 ···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불안한가!
약간의 불편함만 있어도, 조금만 수가 틀려도
쉽게 당황하고 짜증과 불평을 발하고,
얼마나 쉽게 요동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나를 “능히 견고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다.
그러면 내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않는가!
더욱 기도해야 하지 않는가!

오늘로서 로마서 묵상이 끝난다.
로마서는 내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의로움,
즉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의를 확실히 가르친다.
나는 나의 상태에 달려 있지 않은 구원을 얻은 것이므로
나 자신에 의해 흔들릴 필요가 없다.
내게 남은 것은 영적으로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기도 제목이다.
내가 요동하지 않고 늘 견고하여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자로 자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