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2:1-15, 구원, 기업을 무르는 일)

시드기야 왕 10년.
이제 유다의 멸망 1년 전이다.
이때까지도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경고를 무시해왔다.
심지어는 왕이 예레미야의 말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그를 투옥하거나 연금의 술수로 저지하려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유다는 하나님을 빙자하여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확신을 붙들고 있지만,
예레미야는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심판의 경고와 함께 회복의 신호도 보내신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 안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사촌이 자기 땅을 물러달라고 그에게 요청을 했다.
땅(기업) 무르기란 무엇인가?
본문의 표현만 보면 사촌 하나멜의 땅을 예레미야가 돈을 주고 사서 소유권이 가져가는 것으로 이해될 듯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사촌이 어떤 이유로 ─예를 들어 수확의 실패로 빚을 지게 되어─ 땅을 담보로 내놔야 할 경우
그 땅은 희년 때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아올 것이지만
그 이전에라도 가까운 친척─예레미야─이 대신 그 값을 무르면 사촌의 소유권이 유지된다.
즉 기업 무르기는 땅을 잃게 된 친족의 소유권이 계속 유지되게 하기 위한
친족으로서의 의무 이행이다.

물론 이 상징적인 사건은 아무리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투옥되어 있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유다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완전히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일상적인 생활의 대표적인 예가 토지 거래이며, 기업 무르기다.
일상생활의 정상화, 이것이 회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전시의 위기 속에서, 나라가 망하고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일상생활이 회복된다는 것은 다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뜻이요,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상징은 이 의미를 넘어선다.
기업 무르기는 그 정상의 회복을 위해 대가를 대신 치러주는 친족의 수고가 전제된다.
패역하여 심판을 받는 유다를 위해 대신 대가를 치르는 기업 무르기가 일어날 것이다.
그 일을 할 유다의 친족은 누구인가?
애굽이? 암몬이? 모압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할 능력과 선한 마음이 없다.
오직 한 분의 친족이 계시다.
유다를 구해줄 기업 무르기의 권리가 있는 분.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치러야 할 값을 상환해주신다.
그리하여 유다가 그 기업의 상속자가 되는 권한을 회복하게 된다.

본문의 기업 무르기 상징은 결국 유다의 회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상생활의 완전한 회복을 뜻하며,
또한 그것을 위해 치르신 예수님의 대속을 미리 보여준다.
그렇다.
나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서만 온다!
예수께서 나의 기업을 물러주셨다.
내가 진 빚을 청산해주셨다.
죄의 속전을 갚아주시므로 그 볼모에서 나를 해방시켜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친족의 기업 무르기 의무를 행할 자다.
내가 전도해야 할 모든 사람, 내게서 복음을 들어야 할 모든 사람이 나의 친족이다.
나는 그들에게 기업 무르기의 빚을 지고 있다.
하나님께 진 빚을 그들에게 갚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