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0:12-24,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심판 후에 구원이 임한다.
바벨론의 멍에를 메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멍에를 꺾으신다.
죽었더니 다시 살아난다.

아무리 심판과 멍에가 언급되어도 끝에 결국은 잘 될 거라고 하니
희망적이고 듣기 좋은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 사실은 길고 고되며 아슬아슬한 과정이 있다.
그냥 한순간에 모든 것이 자동으로 ‘행복한 결말’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칠 수 없는 상처와 중하고 심각한 부상이 있다.
그 이유는 많고 많은 악행과 죄 때문이다.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잔인한 징계”를 내리셨다.
이것이 간과되고 있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이 환영받지 못하고 거부되었던 것은
그가 희망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줄곧 ‘살길’을 말했다.
이렇게 해야 산다고 말했다.
이유는 그 앞의 이야기가 듣기 싫어서였다.
감당할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심판’, ‘바벨론의 멍에’, ‘죽음’이라는 짧은 단어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아주 자세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언급되었다.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을 슬픈 날, 환난의 날이라 했고,
“남자가 해산하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했다.
악행이 너무 많고 죄가 허다하여 하나님이 약도 없고 처방도 없는 상처를 징계로 주셨다.

유다 백성과 시드기야 왕은 이 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주 간단히 줄여서 심판 후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더 선호하기는 어떠한 고통이 없을 것이다,
이런 말만 바랐다.
그 모든 긴 과정을 그들은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다 알아야 회개할 수 있다.
대충 결말만 안다고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는다.
철저히 아프고 고통스럽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고칠 수 없는 상처와, 약도 처방이 없는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것이다.
포로에서 돌아오며 성읍에 재건되고 감사와 즐거움이 되살아난다.
번성한다.
그리고 가장 감격스러운 말씀은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라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정말 무가치한 자를 “존귀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누가 존귀해질 수 있는가?
자신이 무가치함을 알아야 존귀를 안다.
자신이 지은 죄와 그것의 무가치와 패역함과 파괴력과 얼마나 형편없는 짓이었는지를 알지 않고는
구원을 진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해주신다는 것은
나락에 떨어져 비천한 나를 높여주신다는 말씀이다.
나는 불치의 죄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너는 존귀하다’라고 선언하신다.
이제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올 자”가 있다.
그렇게 패역했던 유다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예수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이요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