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9:1-14, 하나님의 선한 말)

이미 바벨론으로 포로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진행되는 과정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했던 예루살렘의 평화는
점점 잘못된 예언인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바벨론의 침공을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이고
아예 고난이 없을 것으로 자신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유다의 패역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바벨론이 그 도구로서 유다를 패망시킬 것을 줄곧 말해왔다.
유다의 멸망을 전하는 선지자는 충분히 매국노로 몰릴 수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일치단결하여 이방인을 몰아내자고 해도 모자랄 판에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멍에를 멜 것을, 즉 기꺼이 항복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예레미야는 이미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의 적대자들이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잘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다 백성을 적진 한가운데서 키워서
바벨론을 분쇄하기 위한 내부공략으로 시달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에도 예레미야의 적대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 편지 안에 있었다.
거기서 잘 살라는 뜻은
포로 생활하는 가운데도 번성할 뿐 아니라
바벨론을 위해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아니, 적국의 평안을 간구하라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그들이 망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만이 아니라
바벨론도 평안하기를 원하셨다.
이거야말로 매국적인 발언 아닌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예레미야의 선포는 거의 절정으로 향하고 있다.
바벨론에서 잘 살다가 “70년이 차면” 유다로 “돌아오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이로써 하나님의 “선한 말을”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한 말”이 있고 ‘악한 말’이 있다는 것인가?
유다를 꾸짖고 패망과 포로를 예언할 때는 ‘악한 말’이었고
포로 귀환을 예언하는 것은 “선한 말”인가?
그리하여 ‘악한 말’을 취소되고 “선한 말”은 성취된다는 뜻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입으로 선한 말과 악한 말을 하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는 수법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선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언제나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 둘을 합하면 하나님의 “선한 말”은 “성취”된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늘 선한 말인가?
그렇다.
유다의 패망과 포로도 선한 말인가?
그렇다.
100번 그렇다.
왜냐하면 바로 패망과 포로를 통해 유다의 죄가 벌을 받고
유다는 그 심판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이 유다를 다시 살리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은 죄인의 완전한 멸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바벨론 포로는 유다를 정화시키는 기간이며
이를 통해 다시 회복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유다를 다시 살리기 위해 죽게 하신 것이다.
아, 예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선하시다!
이보다 더 큰 진실과 소망은 없다.
이것은 세상이 바라듯 좋은 게 좋은 것인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은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듯이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바벨론이 퇴각하고 결국 유다는 고난 없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고난을 통해 죄가 용서되고 거듭나는 은혜를 주신다.
공의와 사랑이 함께 시행되고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선한 말에는 나의 죄가 간과되지 않으면
나의 회개와 순종이 보류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말의 성취다.
나의 아픔, 고통, 죽음이 하나님의 선한 말이다.
그래야 내가 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