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4:1-10, 좋은 열매, 나쁜 열매)

드디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심판의 말씀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시드기야가 재위 중에 있기는 하지만
유다의 왕의 운명은 바벨론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들이 왕을 잡아가고 새 왕을 임명한다.

유다는 이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사람들과 유다에 남거나 애굽으로 피신한 사람들이다.
전자는 바벨론의 침공에 희생당했고, 후자는 그 화를 면한 자들이다.
그러면 마치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자와 그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로 구분되는 듯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 “무화과 두 광주리”에는
두 종류의 열매가 들어있다.
하나는 “극히 좋은 무화과”요 다른 하나는 “극히 나쁜 무화과”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가 구분되어있다.
이것은 각각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유다가 바벨론을 통해 심판을 받을 것으로 예언되었으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심판을 받은 사람이요 ‘나쁜 열매’로 분류될 것 같고,
반대로 그 심판을 면하고 끌려가지 않은 자들은
‘좋은 열매’로 구분될 것인가?
그렇게 말해도 충분히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다.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같이 잘 돌볼 것”이라고 하시고,
“이 땅에 남아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은 “이 나쁜 무화과같이 버리”겠다고 선언하신다.

어찌 된 일인가?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의 패역한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뜻이었고,
그리하여 그 심판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이요,
그것을 면하려고 인간적인 수를 써서 남고 도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다.
그것은 차후에 그렇게 해석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분명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 심판을 달게 받으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죄인이 죄의 형벌을 받고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바벨론에 기꺼이 항복하고 포로로 끌려가라고,
심지어는 그곳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일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인간들의 상식적인 민족주의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다.
사람들의 정의란 기껏해야 민족과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죄인을 공의롭게 심판하셔서 용서하시고 다시 새롭게 회복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그 뜻이 역사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인간적인 자기 신념을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과로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달게 받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어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높은 자가 되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좋은 열매이며 무엇이 나쁜 열매인가?
고초와 화를 당한 것이 나쁜 열매요, 그것을 면한 것이 좋은 열매인가?
아니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의 구분 기준은 이 땅에서의 형통 여부가 아니다.
얼마든지 악하게 살고도 부와 장수를 누리다가 편안히 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지 않은가!
열매의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기준은 하나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아닌가.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는 그것으로 구분된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않고 어떻게든 형통하면 되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인가?
아, 나는 하나님이 분류하시는 극상품의 광주리에 들어가고 싶은가,
사람들이 구분하는 형통의 바구니에 안주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