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7-47, 모든 먼 데 사람까지)

예수의 분부대로 기다린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
그 표징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말하여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알아듣고 신기해 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외국어로 말한 내용, 즉 “하나님의 큰일”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지식으로 끝날 일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베드로를 통해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은 뒤에
그들은 ‘아, 그렇구나.’ 하고 새로운 지식을 하나 더 보태고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 사실을 단순히 지식에 가둬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물었다.
그것도 또 하나의 지식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마음에 찔려” 그 질문을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 이 사실로 인해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알기를 원했다.
아니 무엇을 하기를, 바꾸기를 원했다.

베드로는 회개와 믿음에 대해 즉답을 했다.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를 믿어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로 끝나지 않았다.
이 말은 각 개인이 예수 믿고 내적 평안을 얻는 것 정도로 축소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를 강조했다.
그것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에 이른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고 내적 평안을 얻을 자가 많다는 뜻인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 뒤에 벌어진 일에서 나타난다.
이들이 사도의 말대로 회개하고 믿고 회개하게 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다.
그들은 함께 모였다.
이것은 왜 베드로가 약속의 범위를 말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이 각각 내적 평안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관계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범위란 그냥 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관계의 범위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면 그는 그와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과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는 지역 교회에 속하며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된다.
그리하여 그의 삶의 내용과 방식은 공동체적으로 바뀐다.
혼자만의 종교적 경건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나누고 배우고 베풀고 함께 하나님께 나아간다.
‘함께’란 수의 많고 적음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관계로 규정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성도와 세상과 자연과 재물과 관계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먼 데 사람”까지로 그 범위가 넓어진다.
그것은 성도의 관계의 넓이의 확대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나의 관계의 범위는 기껏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까지, ‘나를 좋아하는 사람’까지,
아! 참으로 부끄럽게도 ‘만만한 사람’까지로 국한되지 않았는가!
하나님 나라의 범위를 내 마음 편한 정도로 축소시킨 것은 아닌가!
이래가지고야 되겠는가.
나는 사도들에게 물은 사람들의 질문으로 나를 다시 깨우치고 깨뜨려야 한다.
‘내가 어찌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