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9-30, 안디옥 교회)

스데반의 순교는 확실히 복음 전파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것은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움직임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소아시아로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지역적인 범위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확산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말씀이 전해졌다가 점차 이방인에게까지 대상이 확대되었다.
이미 베드로는 로마인 고넬료의 가정에서 함께 교제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성령이 임하는 역사를 보았다.
그러나 고넬료의 믿음은 예외적인 경우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님이 처음부터 뜻하셨던 구원의 계획이었다.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때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맞아, 바로 그거야.
내가 너희에게 준 명령과 약속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는 것,
민족과 인종과 빈부와 종교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가 선포되는 것,
그것이 나의 뜻이다.
이제야 너희가 그것을 제대로 아는구나.’
그러셨을 것이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고넬료의 회심과 성령 받음을 통해 주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 있으므로
안디옥에서의 사건을 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
“바나바”가 피택되어 안디옥으로 보내졌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최초의 열두 사도 외에 나중에 ―바울과 함께― “사도”로 불릴 제자다.(13:43)
바나바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다.
그는 동역자의 중요성을 알았다.
다소 사람, 그리고 지금 다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지도자,
한때 예수를 박해하다가 예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신실한 제자로 바뀐 사울.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서 일 년간 공동 사역을 했다.
그 결과 “큰 무리”가 모였고, 거기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안디옥은 교회의 표준이 되었다.
공동의 사역, 이방인의 믿음,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
이제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들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공동의 사역이 행해지는 곳이며,
어떠한 외모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예수께 모이는 곳이며,
세상과 구별되되 세상을 섬기는 곳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안디옥의 시민들이 예수 믿는 이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그것은 성도들이 자신을 부른 호칭이 아니라 세상이 성도를 부른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롱의 의미도 있고 인정의 의미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성도들은 조롱에서나 인정에서나 사실 동일한 내용의 삶을 사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거친 세상에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더 위하는 어리석은 자로 조롱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겸손과 온유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편법을 이용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자로 조롱을 받았고,
정직한 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과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융통성 없는 자로 조소되었고,
예수 한 분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신념의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조롱과 인정은 오늘날의 기독교인과 ―아니 나와― 얼마나 다른가!
나는 어떤 조롱을 받는가?
어떤 인정을 받는가?
나를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조롱하는 자가 있는가?
그럴 정도로 조롱받을 짓을 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일을 기꺼이 하고 있는가?
나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예수 믿는 자로서 어떤 인정을 받는 것이 있는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술담배 하지 않는 것 말고 인격에서 어떤 인정을 받는가?
나는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가?

세상이 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지 않은가?
누가 나를 조롱하며 나를 인정하는가?
조롱받지 않을 삶을 살며, 인정받지 못할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오, 주님, 부끄럽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 용기와 지혜와 권능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