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34-48,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날 때 가장 방해가 되었던 것은 “외모”였다.
이 경우에 외모란 인종의 차이를 말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요 고넬료는 로마인으로 이방인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인 반면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신앙적으로는 아무 상관이 없고 같이 교제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에 충실했던 유대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그렇게 의도하셨을까?
구약성경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법으로 정하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변경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 모든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셔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영적 우월감에 빠졌던 것이다.
구약 시대에도 이방인이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

고넬료를 만날 때 베드로가 깨달은 것이 이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을 알게 되었다.
이 고백의 뜻은 각 민족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능력을 말하는 데에 있지 않다.
물론 그렇다.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을 스스로 알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무능력하다.
하나님께서 감화하지 않으시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결국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만 그러한 감화를 끼치시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사람들, 즉 모든 인종, 이방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만 구원하실 것이 아니다.
“모든 먼 데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자기 자녀로 부르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요 무한하신 사랑이요 자유로우신 은혜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열두 지파가 해체되고 유대인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들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의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다.
사실 모든 유대인들의 착각이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도 그러했다.
예수께서 “땅끝”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베드로는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고 정확히 풀이했으면서도
그 의미는 여전히 유대교의 인종적 제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그 뜻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바로 지금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 인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신다.
즉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외모를 구분하시고 차별하신다고 믿었다가
지금 고넬료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면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과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다.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아니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의 제자들의 사명이다.

아, 내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도 사람들을 내 관점으로 배제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러하다면 나는 결국 누구를 믿은 것인가.
“모든 먼 데 사람”을 “얼마든지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내 마음에 드는 부류의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나를 믿는 것인가?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의 믿음의 현주소가 이것이다.
나는 ‘나의 믿음’을 포기하고 주님을 믿는 자로 돌아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