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1-16,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오늘 본문의 주안점은 베드로가 유대의 여러 지방을 둘러보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중에
가이사랴의 경건한 백부장을 만나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이방인도 예수를 믿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세상의 땅끝까지 이를 복음은 사실 인종을 초월한 모든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게 될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가이사랴의 고넬료를 부르시고, 욥바에 와 있는 베드로를 준비시키셔서
이들의 만남을 통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심을 보여줄 것이다.
특히 베드로에게 보여주셨던 환상은 이 사건의 핵심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구원의 범위와 일치한다.

이 놀랍고 자명한 복음의 진리와 함께 또 한 가지 놀랍고 감사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친절하신 방법이다.
다메섹의 아나니아가 사울을 만날 때,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날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부르시는 방법이 동일하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 만나라 하셨고,
베드로에게는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셨다.
사울이 누구인지 아는 아나니아도 놀랐고, 율법에 위배되는 명령에 베드로도 놀랐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는 자가 아니냐고 반문하였고,
베드로도 율법이 금하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이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이라고,
베드로에게는 그 짐승들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이라고 설명해주신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베드로의 반문과 이견을 다 용납하시고 그들의 의문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왜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말대꾸하냐고 으름장을 놓지 않으셨다.
사실 아나이나와 베드로의 질문은 다 일리있는 물음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과 나누시고자 하는 대화라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울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시거나 깨끗이 변화된 짐승들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불친절한,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아나니아와 베드로에게 정당한 의문을 갖게 하는 대화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과 대화하시고 싶으신 것이다.
그냥 무조건 따라야 하는 선언적 명령으로, 또는 일체의 의문의 여지 없는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한 단계씩 대화가 발전하기를 좋아하신다.
어떤 점에서는 호기심을 유발하셔서 그 다음 단계의 질문을 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베드로를 대화의 대상으로 생각하시는 것이다.

대화의 기술이 어떠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대화 상대자로, 동역자로 여기신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끝내지 않으셨다.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은 “두 번째” 말씀 하시는 것을 귀찮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런 대화를 “세 번” 하셨다.
하나님은 대화하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의심하는 도마를 대하실 때 하셨던 말씀의 방법이 이러했다.

그것은 또한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의 대화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즉 친절한 대화다.
즉 진정한 존중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내용이 이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무관심하면서 전도용으로만 전략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열정을 가지고 사랑했다가 결과가 보이지 않자 빠르게 체념하거나,
내게서 흔한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대화방식과 너무도 다르다.
진정한 사람 사랑은 말이나 태도에서 진정하게 나타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