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32-5:11, 자기 과시에서 속임수까지)

제자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간구하니 성령께서 그들에게 충만히 임하셨고
제자들은 힘을 얻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했다.
그 결과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는 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렇게 커지는 교회는 단지 수를 불리는 집단 세력이 아니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거듭났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그것은 말로만 과시하는 선전문구가 아니었다.
제자들은 심지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이 팔아 그 값을 교회로 모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이 없어졌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에
그 땅이 이스라엘이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그것을 사유재산으로서 사고 팔 수 없도록 법을 만드셨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과 구세주이심을 믿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나를 속량해주신 구세주이시므로 이제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는 홀로 독점적으로 살 수 없다.
바나바는 그의 이름 뜻대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자로서 그 일을 감당했다.
그는 자신의 밭을 처분하고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그것으로써 연약한 자들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수고대로 물질을 주시며 각자가 자신의 필요에 맞게 쓰도록 자유를 주신다.
또한 공동체를 돌보도록 그 물질을 나눌 마음을 주신다.
물질의 나눔에서 분량을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정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자발적이며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이것을 하나님의 원리대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도들과 공동체에게 잘 보이고자 자신들이 소유를 팔아 일부를 바치면서 전액을 헌금하는 것으로 과시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또는 가난한 자를 위한 공동체적 긍휼로 인해 헌금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헌금을 통해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했다.
근본적으로 이 동기가 잘못 됐다.
만일 실제로 전액을, 아니 그보다 빚을 져서라도 훨씬 더 많은 고액을 헌금한다 할지라도
자신을 위해 한 일이라면 그것은 헌금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거짓말을 했다.
사도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였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사도도 하나님도 모를 것이라고 단정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인 꼴이다.
하나님은 모르고 자신은 알고 있으니 자신이 곧 신이 되는 것이다.

아, 모든 하나님의 일에서 이렇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하려는 마음의 유혹이 얼마나 많은가!
아마도 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할 것이겠지만,
만일 나의 봉사와 열심과 수고와 기여를 아무도 언급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으면, 높여주지 않으면
얼마든지 쉽게 섭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더 나아가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정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가!
이러한 것들이 다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를 위하는 증거가 된다.

심지어는 나를 드러내는 데에는 속임수까지 동원된다.
바로 위선이요 외식이다.
나의 속은 겉과 얼마나 다른가!
속과 겉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결국 속임수다.

아,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로 치셨는데 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참고 기다리셨다.
그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내가 얼마나 큰 긍휼을 입고 있음을 내가 알아야 하며,
그리고 그것은 형제자매에 대한 긍휼로 귀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자가 형제를 판단하면 되겠는가!
위선자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 되겠는가!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가?
바나바인가, 아나니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