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7:29-8:3, 죽임의 골짜기)

“통곡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향해서 하시는 탄식의 선포다.
우리 귀에는 ‘기뻐할지어다’, ‘즐거워할지어다’, ‘찬양할지어다’ 이런 말이 익숙한데
하나님은 우리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성경은 오직 진실한 말씀만을 전한다.

통곡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노하시며 “이 세대를 끊어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다의 죄 때문이다.
얼마나 악한 죄면 그 긍휼 많으신 하나님께서 참고 참으시다 진노하시며 그들을 끊어버리시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악함을 생각하면 이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내내 이 일만 ─하나님의 진노만─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이만큼의 심판은 흔치 않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오래 참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통곡소리만 들릴 이곳에서는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신랑과 신부가 떠들며 쾌락을 나누는 오늘날 세상의 소리는
사실 그 이면에 통곡의 소리가 배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모른다.
그저 즐겁고 쾌락을 즐길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통곡의 소리로 변할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신랑 신부의 잔치는 곧 슬픔과 괴로움과 통곡이다.

그것의 본질은 ‘죽음’이다.
그러나 심지어 ‘죽음’을 넘어 그곳은 “죽임의 골짜기”가 될 것이다.
죽음이란 자연사든 사고사든 돌연사든 모든 죽음을 이른다.
그러나 “죽임”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살해당하는 피살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기한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악한 의지에 의해 그것이 비참하게 중단되는 것이다.
“죽임의 골짜기”는 번역에 따라 “살인의”, “살육의” “학살의” 골짜기로 표현된다.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들리던 곳에
죽임, 곧 살인과 살육과 학살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아,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사람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할 것인가!

아,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 바로 나를 얼마나 참으시는 것인가!
나의 죄대로만 하나님이 갚으신다면 나는 통곡할 새도 없이 벌써 망했고 끝이 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오랫동안 봐주셔서 나를 보호하시고 다시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온전히 회복되도록 도우셨다!
그러니 감사할 것밖에 없지 않은가?
회개할 것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