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1:1-16,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라고 고백한다.
“피난처”와 “요새”는 모두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전제한다.
공격을 받으므로 보호가 필요하다.
“새 사냥꾼”과 같이 전쟁이나 지배를 통해 나의 자유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자도 있고,
“심한 전염병”과 같이 속수무책으로 다수가 순식간에 고통 속에 죽어나갈 수도 있으며,
밤의 어둠을 잘 넘겼나 했더니 “밝을 때” 안전이 확보되기는커녕 “닥쳐오는 재앙”이 있기도 하다.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 이런 것은 인류역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요, 집단적인 사망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섭고 두렵고 가장 혹심한 재앙은 사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께 당하는 형벌이다.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천재지변은 죄 없이 당할 수도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몸은 어차피 죽음이 배어 있으므로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도, 믿지 않는 자도 똑같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에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은 죄 짓고 하나님께 당하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전쟁과 전염병과 천재지변을 막아줄 수 있는 “피난처”와 “요새”보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해주는 “피난처”와 “요새”가 더 중요하다.
적보다 더 강력한 무장을 한 요새에 있다면, 무균실에 있다면, 가장 튼튼한 방호벽을 갖췄다면
어떤 천재지변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피난처와 요새와 지하보호소에서 안전을 확보한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막을 수 없다.

시인은 일차적으로 전쟁과 전염병과 천재지변으로부터의 보호처를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것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영적으로 처하는 공격과 재앙의 상황을 비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구원의 문제다.
사람이 짓는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누구나 죄를 짓고 모두 다 죄인이다.
그리고 죄인으로서 다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고 선언하신다.
아, 그리하여 나는 나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내 영혼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이 구원은 우리의 힘에 의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만한 우리의 마땅한 자격에 의한 것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하나님께 막 살려달라고 부탁을 잘 했기 때문에 얻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사실은 사망에 처해있었으면서도 구원받을 필요성조차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지식과 지혜도 없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며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주신다.
마치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하여서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갚아주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가 나(하나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추켜 주신 표현이다.
실제로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주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 전에 이미 나를 높여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움직이시고, 주관하셔서 하나님을 알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감사히 받아들인다!
내가 뭘 잘한 결과로 구원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고백할 분명한 말이 있다.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 내가 먼저 한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보고서야 하나님을 의뢰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은 하나님께 잘 보여서 병도 고치고 전쟁에서도 생존자가 되게 해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먼저 아셨다.
아! 하나님께서 나는 건져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본 내가 어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랴.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을 보이셨기에 나는 하나님을 의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