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7:1-14, 회개의 흉내에서 회개로)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끌려가서 매년 5월과 7월에 금식을 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그다랴 총독의 암살을 애도하는 금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유다 땅으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지금도 금식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계속해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으로 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보다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다.
금식은 범죄와 고난 가운데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기도의 방편이다.
생명의 공급을 위한 식사를 중단·삭감할 정도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금식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되물으신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반복된 말씀 앞에 유다의 모습은 처절하다.
하나님이 몰라서 그 여부를 묻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답(질문)은 ‘그 금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그럼 누구를 위한 금식이었나?
그것은 종교적인 형식을 통한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아, 회개와 애통도 얼마든지 외식적일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꿰뚫어 보신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금식을 했고 지금 그것을 계속할지 묻는 것은
결국 회개에 대한 질문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전적으로 유다 백성의 죄악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그들은 회개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죄의 대가의 기간이 다 끝난 지금도 계속 회개해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반문은 그 금식이 과연 죄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회개의 흉내일 뿐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유다 땅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지금은 이제 더 이상 죄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청종하는가)의 여부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로 귀환한 백성들에게도 “내게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뜻이요 계속 회개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회개가 외식적 흉내에 불과한 것이 문제다.

그럼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무슨 말씀?
“진실한 재판 ··· 인애와 긍휼 ···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돌보는 것이다.

아, 이것보다 사실은 금식이 더 쉬웠다!
일 년에 두 달을 금식하는 것이 이 말씀의 순종보다 더 쉬웠다.
그리고 유다는 ─나는─ 더 쉬운 쪽을 택한 것이다.
아, 나는 유다처럼 금식도 안 하고 있다.
나는 그보다 더 쉬운 것을 택했다.
교회 출석, 매일 묵상, 몇 가지 교회 봉사, 술 담배 안 하는 것 등등…
그것─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쉬운 것을 택한 것─은 회개가 아니다.
회개의 흉내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와 경건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회개와 경건의 형식이다.
바리새인이 그러했고 나는 바리새인이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것, 본문에서나 나중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나 동일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요 경건이다.